독립군들의 만주 항일투쟁을 안방에서 도와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 허은 여사가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국가보훈처는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해외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와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1일 3·1 독립만세 운동을 재현해 '제2의 유관순'으로 불린 배화여학교 6명의 소녀 등 177명(여성 26명 포함)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
허은 여사는 시조부 이상룡 선생이 남긴 '석주유고', 시부 이준형 선생의 '유서', 허은 여사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 등의 자료에서 공적이 확인돼 이번에 포상자에 포함됐다.
허은 여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이자, 한말 의병장이던 왕산 허위 집안의 손녀이다.
8살 때인 1915년 가족들을 따라 서간도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이 바로 그녀의 종고모이다. 16세가 되던 1922년, 허은은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했다.
그녀는 가족은 물론 만주지역 항일지사들의 버팀목이 돼 온갖 고난을 견뎌내야 했다. 굶주림과 추위, 각종 전염병은 물론 잔혹한 일제와 중국 마적은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특히, 서로군정서 회의와 같은 각종 회의가 집에서 이뤄지다보니 하루하루 부족한 땟거리를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허은 여사는 이런 여건 속에서도 서로군정서 대원들과 김동삼·김형식과 같은 항일투사들에게 손수 옷을 지어 드렸던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며 이들을 잘 보필해 주는 것이 곧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 여겼다고 회고했다.
허은 여사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이듬해 이상룡 선생이 서거하자 고국으로 돌아왔다.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다 써버려 고국으로 돌아온 이후 이들은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고 집안 형편이 좀 나아질 무렵 1997년 허은 여사는 돌아가셨다.
허은 여사는 회고록에서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남 앞에 비굴함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선대의 긍지가 그들 핏속에 자존심으로 살아 있구나 싶다"고 했다.
한편, 배화여고 학생이었던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 등 6명은 1920년 3월 1일 학교 기숙사 뒤편 언덕과 교정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검거돼 재판에 회부됐다.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李대통령, 대북전단 살포 예방·사후처벌 대책 지시
李대통령, 취임 후 첫 출국…G7 정상들과 양자회담 주목
TK가 공들인 AI컴퓨팅센터, 정권 바뀌니 광주 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