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도에 애정 갖고 살다간 이름 없는 이들의 노력 함께 기억되길…"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기획운영부 이병호 씨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에 근무하는 이병호 씨가 1997년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에 근무하는 이병호 씨가 1997년 '발해항로 학술 뗏목탐사대' 대원으로 참여했던 선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도훈 기자

"애국심 같은 거창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개인적인 기질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 10월 울릉도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북면 석포마을에 둥지를 튼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개관 멤버로 기획운영부에 근무하고 있는 이병호(36) 씨는 입사 동기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그러나 앞서 안용복재단(지금의 독도재단)과 울릉도·독도 해양연구기지에서 근무한 이 씨의 이력을 보면 이 답변으로는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주위에선 '바다' '독도' 등으로 집약되는 그의 이력에 대해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울릉도 토박이인 이 씨의 선친은 고대 발해인들의 해상개척 루트를 찾아나섰던 1997년 '발해항로 학술 뗏목탐사대' 대원이었다. 발해건국 1천300주년인 1997년 12월31일, 이 씨의 선친 고(故) 이덕영 씨를 포함한 대원 4명은 고대 해상항로를 복원하기 위해 뗏목 '발해 1300호' 를 타고 탐험에 나섰다가 이듬해 1월23일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 인근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모두 목숨을 잃었다. 탐사대는 당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해 울릉도와 부산을 거쳐 제주 성산포항에 이르는 1천200여㎞를 항해할 예정이었다. 당시 이 씨는 경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유학(?)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시기 전 학교를 찾아 오셨는데, 함께 점심식사를 한 게 마지막이 됐습니다."

고 이덕영 씨의 울릉도 사랑은 각별했다. 그는 안정된 직장인 농협을 그만두고 고향 석포에서 약초를 키우고 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울릉도 야생화를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고, 주민들과 '푸른 독도 가꾸기' 운동을 벌였다. 우리 토종이 없어지는 데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1987년 산악인 박인식씨와 '농심마니'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농심마니 운동은 산삼을 토종의 상징으로 삼고 전국 명산을 찾아다니며 산삼을 심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들 두 모임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 씨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연스레 독도에 대한 관심과 애향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 씨는 선친이 세상을 떠난지 21주기가 되는 내년 1월엔 부인과 3살배기 딸을 데리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올 예정이다. 탐사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극동연방대학교 전시관을 둘러보며 선친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다.

"'독도'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사실 각별한 애정을 갖고 각자의 방식으로 독도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은 훨씬 많습니다. 이들의 노력도 오래도록 함께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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