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에서 돌을 맞은 사내 아이는 한복을 입고 모자인 복건(幅巾)까지 갖춰 쓴 채 의젓하게 웃고 있다. 여자 아이는 치마, 저고리에 굴레를 쓰고 있다. 이처럼 세상이 변해도 사진 속의 순간은 변하지 않고 추억과 감정, 이야기가 그대로 박제돼 있다. 요즘 사진은 흔해진 만큼 그것이 주는 감동도 옅어졌다. 유행에 밀려 사진관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라라사진관'(상주시 남성동)은 60여 년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래된 사진관
상주 중앙시장 입구 좁은 도로를 따라 시장 끝자락 모퉁이에 '라라사진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20여 평의 사진관에는 빛바랜 사진과 오래된 카메라들이 옹기종기 진열돼 있다. 선반 위에는 안두호(64) 대표가 사용했던 오래된 카메라가 먼지를 뒤집어 쓴채 진열돼 있고, 그 밑에는 운동회, 졸업식, 소풍, 돌, 결혼, 회갑 사진들으로 가득하다. 바깥 전시실에도 잘 나온 가족 사진들이 진열돼 있다.
사진관 한 켠에는 오래 전 필름 현상과 사진을 인화하던 암실이 그대로 있다. 안 대표는 "이곳은 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때 청춘을 불살랐던 나만의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역한 현상약품 냄새는 여느 향기로운 냄새와 다르지 않았고, 어두운 붉은 암실은 포근한 조명이 비추는 나혼자만의 공간이었다. 밤을 새워 작업을 해도 즐거웠다"고 회고했다.
◆1952년 문 열어
라라사진관은 지금은 고인이 된 이공희(1934년생, 1997년 작고)가 사진기술을 배워 1952년 개업했다. 사진관 이름을 라라사진관으로 지은 사연도 재미있다. 안 대표는 "고모부가 손님들은 기분좋은 일이 있을 때, 주로 사진을 찍으러 온다는 것을 알고, 손님이 사진관에 기분 좋게 들어올 수 있게 간판을 경쾌한 음악리듬을 잘 표현하고 있는 '랄랄라'와 비슷한 발음인 '라라사진관'으로 지었다"고 설명했다.
안 대표는 라라사진관의 2대 사장이다. 초대 이공희 사장의 처조카로 10대 후반, 고모 소개로 사진관에 첫발을 디뎠다. "아버지가 기술만 있으면 먹고살 걱정이 없다고 권유해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운동회, 소풍, 졸업앨범, 결혼, 회갑 등 일이 많아 사진사는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안 대표는 고모부가 1997년 작고하자 사진관을 이어받았다.
사진관은 명절이 되면 늘 사람으로 붐볐다. 특히 상주 전통장날인 2일과 7일이 되면 사진관은 손님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셔터를 누르기 바쁘게 또 다른 손님을 안내해야 하는 등 밀려드는 손님들로 점심을 거를 때도 많았다. 외부 출사가 있는 날이면 마치 소풍가는 기분이 들었다. 출사용 뷰카메라를 비롯해 렌즈와 삼각대, 흑백사진용 필름 홀더백 10여 개를 자전거에 싣고 남은 짐은 등에 걸머졌다. 무게는 엄청났지만 즐거웠다. 결혼이나 회갑 기념사진 촬영을 마치면 칙사 대접을 받았다.
그 당시는 요즘처럼 포토샵 등 정보통신장비와 기술이 전혀 없었던 시기였다. 뾰족하게 깎은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수정하던 시대였다. 그 과정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다. 흰 아크릴 판에 필름을 올려놓은 후, 뒷면에 빛을 비추고 일일이 수정해야 하므로, 고난도 기술이 요구되고 집중력과 기술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포토샵 못지않은 '연필 수정'으로 신랑·신부를 돋보이게 했다. "얼굴에 살이 없으면 연필로 살짝 볼에 색칠하고, 삐죽하게 깎기도 하고, 그때도 다 수정이 있었다"고 했다.
안 대표는 그래도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행사장에서 사진을 촬영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면 무거운 사진기와 삼각대를 들고 사진관 문을 열 때 반갑게 맞아 주던 아내의 모습이 그립다"고 말했다.
◆외환위기·물난리·디지털 시대, 그리고
흑백 시대를 지나 컬러 시대가 도래했다. 흑백사진이야 암실에서 현상과 인화를 할 수 있었지만 컬러사진은 촬영을 하면 현상·인화하기 위해 대도시로 보내야 했다. 안 대표는 시대 변화에 빠르게 대처했다. 상주 시내 초중고 학교 앨범에 주력하면서 예식장과 협업해 동반 성장을 도모하면서 사업 영역을 넓혀 나갔다.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필름을 비롯해 인화지 현상료 등 사진에 필요한 원자재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1998년 태풍으로 상주시에 물난리가 났다. 연일 쏟아지는 폭우로 상주 시가지가 물바다가 되었다. 라라사진관도 피해를 입었다. 사진 기자재는 물론 그동안 촬영해 보관해오던 자료가 몽땅 물에 잠겨 못쓰게 되었다. "너무 아까워요. 고모부 때부터 찍어왔던 것인데…"
그리고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쳤다. 디지털카메라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디지털카메라가 나온 지 얼마 안 돼 카메라 기능을 갖춘 스마트폰이 등장했다. 필름의 제약 없이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면서 사진관은 '인화하는 곳'으로 밀려났다.
안 대표는 예전 사진 한장 한장을 기다리고 소중히 여기던 시절이 아쉽다고 했다. "예전 사진은 지금처럼 다양하진 않았더라도 사람들의 추억과 마음이 묻어 있었다. 요즘 생각해 보면 그런 모습이 그리울 때가 있다"고 했다.
◆ 2대를 넘어 3대까지
안 대표는 지금까지 사진관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상주 시민의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주 시민이 고맙다.
안 대표는 조만간 사진에서 손을 떼려 한다. 아들이 그의 뒤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을 전공한 아들 동만(36)씨는 아버지 뒤를 이어 인근 예식장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일흔이 되면 그만 둘 생각이다. 아내와 밀린 여행을 하면서 작품 사진도 찍을 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안 대표에겐 숙제가 하나 있다. 1998년 물난리로 잃어버렸던 상주의 옛모습과 역사를 하나하나 찾아가 사진으로 간직하는 일이다. "지금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그 풍경들은 사라지기 때문에 누군가는 꼭 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손때가 묻은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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