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개 발에 편자

서종철 논설위원
서종철 논설위원

1991년 1월, 3주가량 유럽의 지방자치 현장을 둘러본 적이 있다. 우리 지방자치 시대 개막을 앞두고 선진국 지방자치 실태 취재가 목적이었다. 1960년 12월, 3차 지방선거를 끝으로 맥이 끊긴 한국의 지방자치제가 31년 만에 지방선거(1991년 3월 26일 기초의원 선거) 실시로 부활을 앞두면서 국민들 관심과 우려가 자연스레 지방자치에 쏠린 때였다.

당시 유럽 출장에서 받은 가장 강한 인상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 각국의 지방자치 역사나 전통, 시스템이 아니었다. 바로 주민 대표이자 지방의회를 지탱해나가는 의원들이었다. 그들은 정치에 인이 박이고 정당 색이 강한, 특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낮에는 생업을 꾸리고, 저녁에 시간을 쪼개 의회에 나와 지역 현안을 토론하고 처리한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수천만원의 의정비나 수당은 꿈에도 없는 일이었다. 고작 메모지와 필기구, 홍보 스티커가 보상의 전부였다. 지역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부심이 때로는 심야까지 의회 불을 밝혔고, 우리 동네를 바꿔나간다는 사명감이 건너뛴 저녁 식탁의 메뉴가 됐다. 그들은 약사나 제빵사, 편의점주, 대학생까지 거리에서 늘 마주치는 장삼이사였다. 유럽 지방자치의 힘은 이들의 상식과 교양, 이성과 합리가 작용하고 굳어진 결과다.

지난 연말 미국·캐나다로 연수차 외유에 나선 예천군의회 사태가 뒤늦게 이슈가 되면서 연일 활자와 전파가 달아올랐다. 국민 혈세로 외유에 나선 것도 뒤가 켕기는 일인데 연일 술판을 벌이고 접대부 수소문에다 급기야 가이드 폭행 등 만행까지 벌였다니 이들의 추태에 국민 뒷목이 뻣뻣할 지경이다.

이런 분노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으로 옮겨붙었다. '지방의원 해외연수 금지' '기초의원제 폐지' 등 관련 청원만 여러 건이다. 몇몇 몰지각한 의원들 탓에 전체 지방의원이 앉아서 욕을 먹는 꼴이다. 그렇지만 예천군의원들이 보여준 수준이 바로 한국 지방자치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미꾸라지가 흐린 물'에 혀를 차고 끝낼 문제는 아니다. 지금 지방의원 수준으로는 한국의 지방자치는 '개 발에 편자'다. 곪아 터지기 전에 서둘러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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