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식(천주교대구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장) 회장님, 그는 40여 년 동안 나를 이끌어 주신 대부님이다, 그는 세속적으로는 나이 한 살 많은 형과 같은 존재였지만 신앙적으로는 큰 선배로서, 영적인 아버지로서 긴 세월 동안 여러 가지 교회 봉사를 함께 하면서 나를 이끌어 주신 분이시다. 그래서 내가 최 회장님을 만난 것은 세속적인 표현으로는 숙명적이라 할 수 있지만,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라고 믿는다.
내가 처음 최 회장님을 만난 것은 1976년 12월, 복자 성당에서 세례를 받을 때 고향 후배의 소개로 그를 대부로 모셨을 때다. 이듬 해 7월, 효목성당이 신설되어 같이 분가해 오면서 우리의 깊은 인연이 시작 되었다.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많이 가르쳤는데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솔선수범 하는 행동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 시절 큰 어려움을 겪는 나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 주었고, 기도로 이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하라고 격려해 주던 일은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효목본당 생활 3년여 만에 최 회장님이 이사를 감으로써 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헤어진 지 1년여 만에 다시 만났다. 내가 꾸르실료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교구 꾸르실료 운동의 대선배인 최 회장님을 다시 만난 것이다. 회장님은 새내기 봉사자로 들어 온 나를 잘 이끌어 주어 교회 봉사자로 만들어 주었고, 내가 꾸르실료 회장을 처음 맡아 봉사 할 때는 교수부장으로 들어와 내가 회장 봉사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대구대교구 꾸르실료 사무국 주간을 맡아 6년간 봉사하는 동안 최 회장님은 선배 주간으로서 지도임원을 맡아 많은 가르침을 주었으며 사무국 사업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교구 꾸르실료 운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는 새로운 교구의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최 회장님이 당시 천주교 대구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을 맡고 내가 부회장으로 최 회장님을 보필하게 된 것이다.
2000년, 우리는 3년 동안 봉사하던 교구 평협 봉사를 마침으로써 우리는 헤어졌고, 나이도 70세를 바라보게 되었으니 다시 함께 봉사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고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또 만나게 되었다. 2002년, 만촌1동 본당이 신설되고, 나는 효목본당에서 분가하여 이곳으로 옮겨 왔는데, 이듬해 2월, 최 회장님이 이곳으로 전입해 온 것이다.
최 회장님은 2대 재무평의회 회장을 맡게 되었고, 이어서 본당 성전건립위원회 회장을 겸하게 되었는데, 나도 위원으로 참여하여 사업부장을 맡게 되었고, 성전건립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 추진본부장을 맡아 4회나 바자회를 개최하면서 최 회장을 보필하였다.
2007년, 성전 봉헌식을 무사히 마치면서 우리가 40년 가까이 함께 해오던 교회 공적 봉사는 마무리 되었고, 거의 매일 성당에서 만나 교회일, 세상일, 여생에 관한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면서 지냈는데, 이제 최 회장님은, 아니 대부님은 떠나시고, 어느 교우의 말처럼 대부를 여의고 '신앙의 고아'가 되어 대부님과의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대부님은 나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참 겸손을 생활로 가르쳐 주셨고, 교회와 형제자매들에 봉사하는 마음과 행동의 바른 자세를 표양으로 가르쳐 주셨으며. 언제나 겸손과 친절, 밝은 삶으로 이끌어 주셨다.
대부님과 마지막 작별하던 때, 평안히 잠든 듯한 모습을 보면서, 세상만사 지나고 보면 모두 아쉬움이 남듯 대부님의 선종도 아쉬움은 많이 남지만, 죽음의 고통이나 두려움 없이 평안히 선종함은 '죽음 복'을 받으셨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도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대부님처럼 살면 저런 '죽음 복'을 선물 받을 수 있을는지….
대부님, 하느님 뵈오며 행복한 천상의 삶을 누리십시오.
정만진(전 천주교대교구 언론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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