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명화 속 숨은 이야기] ⑤희망의 장미… 동독 통일시위 광장에 장미 한송이 "독일은 하나"

이자 갠즈켄 작
이자 갠즈켄 작 '장미'

이자 갠즈켄, '장미', 알루미늄과 아연을 씌운 스틸, 독일 라이프치히 메세 광장에 설치, 1993년

2019년이 밝았다. 전국 대학교수들이 선정한 지난해의 사자성어는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임중도원'(任重道遠)이다. 현 정부의 과제인 한반도 평화 구상과 산적한 국내 정책의 난제를 굳은 의지로 해결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것을 골랐다고 한다.

작년 한 해는 사회 전반적으로 힘들고 우울했는데, 올해의 전망 또한 그리 밝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새로운 해를 맞이해 우리 사회에 보다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의미로 특별한 장미 한 송이를 소개하고 싶다. 독일 미술가 이자 겐즈켄(1948~)은 1993년, 구 동독의 도시 라이프치히 메세 광장에 9m가 넘는 한 송이의 장미 조형물을 설치했다. 알루미늄과 스틸 재질로 제작된 가느다란 줄기와 가시들, 맨 위의 붉디붉은 꽃봉오리의 장미 한 송이는 고고히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녀의 <장미>는 뉴욕현대미술관 외부, 2015년 개관 후 파리의 새로운 명소가 된 루이비통재단미술관 로비 등에도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설치되어 있다.

1989년 11월 9일,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독일에서는 당장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약 2주 후 라이프치히의 월요데모에서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에서 시작해 '통일된 조국 독일'로 발전하면서 통일이 구체화되었다. 겐즈켄은 이런 이유로 무혈 평화시위에 의한 통일을 기념하는 <장미>를 라이프치히에 세운 것이다.

우리 시대의 연약함과 파괴, 아름다움과 야만성을 동시에 끄집어내는 겐즈켄은 이 연약하게 보이지만 강인한 장미를 통일된 조국을 위해 바쳤다. 그녀의 장미 조형물은 요제프 보이스가 손에 들고 있었던 '직접적인 민주주의를 위한 장미'를 연상케 한다. 장미는 갑자기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씨앗에서 시작해서 초록 잎에 의해 둘러싸인 후 꽃을 피운다. 보이스는 이런 장미꽃의 유기적인 변화를 진화로 언급하고, 이를 예술을 통해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려는 '사회적 조각' 혁명에 비유했다. 보이스가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낙방한 학생들을 위해 시위를 벌이다가 대학본부로부터 교수직에서 해임된 사건은 겐즈켄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녀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의식을 예리하게 작품으로 담아내는 데는 보이스의 영향이 크다.

나치였던 조부를 둔 겐즈켄은 전쟁으로 인한 물질적・정신적 폐해를 극복하려는 전후 독일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1970년대 초, 독일을 대표하며 현재까지도 국제무대에서 막강한 권위를 지닌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문하생이 되고 나중에 그와 결혼하면서 그녀의 삶과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다.

내가 겐즈켄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2007년, 독일의 소도시 뮌스터에서 10년마다 열리는 조각프로젝트에서다. 성당 앞에서 아이들에게 친숙한 봉제인형이 앉아 있는 작은 의자, 테이블, 파라솔이 바람에 나뒹굴게 연출한 작품을 통해 작가는 사제들에 의한 어린이 성추행이나 성폭력 사건, 즉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밴덜리즘(vandalism)을 고발한다.

2001년, 겐즈켄이 월드트레이드 빌딩이 폭격된 911테러를 직접 목격한 후 제작한 와 연작에서는 아비규환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사적으로 묘사하면서 절망을 넘어 인간에 대한 연민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이혼, 알코올중독, 양극성장애우울증 같은 개인적인 아픔을 극복한 겐즈켄은 동시대 삶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과 우리 시대의 폐허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비록 가늘고 연약해보지만 통합, 정의와 희망의 상징으로서 꼿꼿이 서있는 겐즈켄의 <장미>처럼 우리 정부도 올해는 굳은 의지를 다잡아야만 할 것이다.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라는 경제기조는 점점 더 팍팍해지는 삶을 마주한 서민들에겐 현란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현 정부가 역설하는 진정한 개혁은 지금과 같은 밀어붙이기식으로는 결코 이루지 못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진정한 리더십의 상징으로서의 장미가 필요하다.

박소영(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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