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반바지와 오보에

임상준 경북부 차장
임상준 경북부 차장

프랑스의 전쟁 영웅 잔 다르크가 화형된 까닭은 '마녀'란 누명이 씌워져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마녀'라는 죄명 못지않게 중요한 범법 사유가 하나 더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여자인 잔 다르크가 남장을 한 불경죄다. 작금의 잣대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나 당시에는 여성의 남장은 큰 죄악에 속했다. 그녀는 전장에서 늘 활동하기 편한 남성용 재킷과 반바지 차림 갑옷을 입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이 다리를 보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낸다는 의미가 강했다.

결국 콩피에뉴 전투(1430년)에서 영국군에게 붙잡힌 그녀는 마녀로 몰려 종교재판에 회부됐다. 이후 수감생활 중에도 지급된 여성용 드레스를 끝끝내 거부하고 반바지를 고수했다. 꼬투리 잡기에 안달이 난 재판관들에게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그녀의 진짜 죄명은 남성복 반바지 착용이었다면 과장일까.

지난달 북한 리용호 외무상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 북측 대표단 숙소인 베트남 하노이 한 호텔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한 것과 관련,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 회견인 터라 한 외신기자가 상의는 넥타이를 맨 정장, 하의는 미처 옷을 다 챙겨 입지 못해 반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미 하노이 회담 결렬에 따른 북한의 조급함이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겼다.

11일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외교·안보 핵심 인사들이 잇따라 미국을 방문, 북미 협상 교착 타개를 위한 사전 조율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하노이 결렬' 이후 북한은 단계적 접근, 미국은 일괄타결식 해결을 내세우며 강경하게 대립하고 있어 꼬인 실타래가 쉽게 풀릴지는 의문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조급함은 오히려 악수로 이어진다는 점은 이미 한미 방위비 협상 등에서 경험했 듯 경제적 손실로 돌아올 수 있다. 안달 난 쪽이 항상 더 많은 걸 내어준다는 건 연애든 외교든 진리다. 느긋하면서도 대화의 주도권을 한국이 가져올 수 있는 부드러운 협상안을 개발해야 한다. 운전석, 조수석 등 운전대에 집착하지 말고 자가용 밖으로 뛰쳐나오는 새 패러다임을 짤 필요가 있다.

세계 3대 앙상블인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단원들이 매번 투표로 악장을 뽑아 공연을 이끈다. 튜닝은 관현악기인 오보에(프랑스어로 높은 음을 내는 나무라는 뜻)에 맞춘다. 오보에는 빠를 때는 중세 귀족풍의 분위기를 보이지만, 보편적으로 마음을 가라앉게 하고, 때로는 구슬픈 음색을 자아내기도 한다. 한때 중세 유럽 때는 오보에의 고운 음색이 신성함과 부딪힌다(영혼까지 빼앗긴다)는 이유로 연주가 금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천상의 소리 이면에는 너무 튀어 자칫 앙상블을 망치는 악마로 간주되기도 한다.

1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때로는 귀족풍으로 당당하게, 일부 현안에선 부드러우면서도 상대의 마음과 영혼까지 가져올 수 있는 조율(튜닝)이 되길 기대한다. 그렇지 않고 빠른 결과물을 얻기 위해 조급함을 가진다면 한미 회담이란 앙상블을 그르칠 수 있다. 다소 초조하더라도 우리의 속내까지 다 드러내는 반바지 차림이어서는 곤란하다. 반바지 입을 때는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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