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낙태 논쟁/ 임종식 지음/ 사람의무늬 펴냄

낙태죄폐지반대국민행동 단체 회원들이 지난 4월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 반대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낙태죄폐지반대국민행동 단체 회원들이 지난 4월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 반대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 관련 판결이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2012년 낙태죄 합헌 결정 후 7년 만에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이는 낙태죄가 사실상 위헌이기는 하지만, 즉가적인 무효화에 따르는 법의 공백과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법률을 개정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그 효력을 존속시키겠다는 결정이다. 헌재가 정한 올 연말까지 개정안을 형법에 반영하지 않으면 낙태죄는 위헌으로 그 효력을 자동 상실하게 된다. 개정안의 국회 통과와 무관하게 낙태죄는 66년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이제 낙태 찬성론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낙태 논쟁이 다시 불이 붙을 것이 뻔하다. 그 길이 순탄치 않을 것임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낙태 논쟁
낙태 논쟁

◆인간 생명의 시작점은 언제?

과거 신학자들은 영혼이 들어오는 시점을 놓고 입장이 달랐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액과 생리혈이 섞여 수태가 이뤄진다고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액을 동인으로 태어나는 처음부터 식물적인 삶을 살고, 시간이 지나 식물적 영혼이 소멸되면 동물적인 삶을 살게 되고, 다시 동물적 영혼이 소멸되면 이성적 영혼으로 대체돼 인간의 삶을 산다고 보았다. 중세까지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수태 이후 영혼이 들어온다는 '수태 이후 영혼주입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1500년대 들어서며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수태와 함께 영혼이 들어온다는 주장이 태동한다. 그후 1600년 무렵 피에누스가 식물적 영혼과 동물적 영혼은 인간의 배아에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고 대신 정액이 사출된 지 3일 이내에 이성적 영혼만 들어온다고 주장했다.

◆0.1mm 크기 수정란부터 사람?

2012년 12월 독일의 한 파티에서 약이 든 음료를 마신 25세 여성이 강둑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그녀의 상태를 처음 확인한 응급의가 사후피임약을 처방한 후 정밀검사를 위해 한 종교계 병원으로 보내지면서 한 편의 막장 드라마가 연출됐다. 그곳 의사는 진료를 거부했고 새로 찾아간 종교계 병원의 의사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상담조차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여론이 들끓어 며칠 후 독일 주교회의가 성폭행 여성에게 사후피임약 처방을 허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수정을 막는 경우에 한하고, 수정된 난자를 낙태시키는 경우에는 여전히 불허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놀랍게도 성폭행 피해여성을 진료하지 말라는 것이 병원의 방침이었다. 그 이면에는 수정란부터 사람, 즉 생명이 있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0.1mm 크기의 자의식도 없고 통증도 못 느끼는 단세포에게 생명권이 있을까. 그 단세포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고, 사후피임약은 살인도구일까.

◆낙태를 보는 세 가지 관점

난마처럼 얽힌 낙태 문제를 어디서 풀어야 할까. 해법은 간단하다. 어느 시점부터 태아가 생명권을 가지는지를 규명하면 된다. 태아에게 생명권이 없음에도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진영은 '임신 전 기간에 걸쳐 낙태는 살인이 아니다'라 보고 있다. 절충주의 진영은 '수태와 출생 사이의 어느 시점까지 낙태는 살인이 아니다'라 보고 있다. 보수주의 진영은 '수태 시점부터 낙태는 살인이다'고 해 수정란 시점을 지목하고 있다. 이는 보수주의 진영이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고 미프진(임신 중절 약물)의 도입을 저지하고 있는 이유이다. 더구나 보수주의 진영과 함께 성경은 인간 생명의 시작점에 대해 침묵하며, 오히려 출생시점에 시작될 가능성까지 열어놓고 있다. 수정란부터 생명권이 있다는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미프진은 살인 도구가 맞다. 반면 자의적 해석에 근거한 것이라면 미프진의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美, 임신 6개월 內 낙태권 인정

낙태문제가 문화, 사회, 인간학, 여성학, 보건의학 등 전방위적 관점에서 조명되고 있다. 헌법재판관도 "자신이 처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 결정입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 논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데 유의해야 한다. 미국 법철학자 드워킨이 "권리란 카드로 치면 으뜸패에 해당한다"고 하듯이, 사회학자 재퍼스와 넬킨이 "권리를 패할 수 없는 도덕의 으뜸패"로 정의하듯이 문화, 사회, 심리, 경제 등의 카드로 법과 도덕의 으뜸패인 '권리'에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대법원도 1973년 임신 후 6개월까지의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하며 6개월 이전의 태아는 모체에 의존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 지은이는 "태아에게 생명권이 있는지, 있다고 해도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에 앞서는지 등의 권리에 관계된 물음을 빗겨 가서는 낙태와 사후피임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284쪽 1만5천원.

▷지은이 임종식=성균관대 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학대학교 철학과에서 윤리학과 행위철학 분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군관대 초빙교수이며, 생명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와 죽음에 관련된 형이상학적 물음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 '형사법과 살해의도' '인간, 위대한 기적인가 지상의 악마인가' 등이 있으며, 공저로 '생명의 위기' '지식의 최전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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