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용섭의 북한화첩기행]묘향산(2)

향산호텔~국제친선전람관 여정은 북한이 자랑하는 필수 관광코스
룡연폭포, 인호대, 9층폭포... 묘향산 골짜기들이 단박에 들어오는 명소
역사적 의미까지 갖춘 보현사 절경,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 다 못해

길을 헤메는 길손에게 호랑이가 나와 길을 알려주었다는 전설이 있는 묘향산 인호대.바위 양쪽으로 폭포수가 흘러내리고 있다.
길을 헤메는 길손에게 호랑이가 나와 길을 알려주었다는 전설이 있는 묘향산 인호대.바위 양쪽으로 폭포수가 흘러내리고 있다.

묘향산은 평안북도 향산군, 평안남도 녕원군, 자강도 희천시까지 3개 도에 걸쳐있다. 흰 바위들이 크게 보인다고 한때 태백산, 또는 서산이라 불렸다. 향나무, 소나무, 측백나무 등으로 숲에서 묘한 향기가 난다 해서 묘향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초입의 향산호텔을 지나 국제친선전람관을 도는 여정은 북한이 자랑하는 필수 관광 코스다. 우리 일행은 산 속에 있는 국제친선전람관을 돌아보고 전망대로 나왔다. 눈 앞에 묘향산 비경이 꽉 찬 것으로 모자라 운무로 둘러싸여 신비감이 더해진 절경을 한 번에 맛보고 있었다.

국제친선전람관 전망대에서 묘향산을 화첩에 담고있는 권용섭 화가.
국제친선전람관 전망대에서 묘향산을 화첩에 담고있는 권용섭 화가.

주변이 너무나 조용했다. 마치 주인없는 별장 같았다. 나는 산수의 진경을 좇아 미지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산하의 반쪽만 봐온 나는 우리의 산수화를 '관념산수화'라며, 중국의 풍경을 도입해 국적없는 산수화로 그린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미지의 세계를 붓으로 풀어냈다. 운무는 산허리를 감았고 소나무는 분재처럼 희끗희끗 보였다. 나는 여러 장면의 그림을 속사하고 있었다. 순간 건물 아래에서 누군가가 속사를 제지하려는 듯 손짓을 했다. 마침 이를 뒤에서 지켜보던 안내원이 괜찮다는 손짓을 건물 아래로 보냈다. 허락이자 승인이었다. 덕분에 이후 시간은 여유로웠다.

잠시 뒤 우리는 바위들이 뒤엉킨 계곡으로 들어섰다. 룡연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병풍같은 바위벽에 묘한 바위가 눈길을 끈다. 절벽 앞에서 갈 길을 몰라 헤매는 길손에게 호랑이가 나와 길을 알려주었다는 전설이 깃든 '인호대', '인호정각'이다. 바위 양쪽에는 폭포가 떨어졌다.

은덕루에서 바라본 묘향산 9층폭포.
은덕루에서 바라본 묘향산 9층폭포.

위로도 누에가 섶을 오르는 듯한 모양의 폭포가 여럿 보였다. 묘향산 골짜기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였다. 비스듬히 누워 250여 미터의 암반을 씻어 내리는 9개의 계단, 그리고 그 위로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9층폭포가 있다. 그 곁에는 '은덕루'가 절경을 조율하고 있다.

향로봉 중턱에 있는 '단군성동'은 단군이 태어나 살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단군성동 뒤에 전망이 좋은 단군대라는 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노을에 붉게 타는 연봉들을 바라보는 경치는 절경 중에 절경이다. 예로부터 묘향산 8경의 하나로 꼽히는 '단군낙조'다.

묘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석가여래탑.석가여래탑.북한 국보 144호이다.
묘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석가여래탑.석가여래탑.북한 국보 144호이다.

산행을 끝내고 보현사를 찾았다. 사찰 안내원이 없었다. 사찰 안내원을 기다리는 동안 신혼부부와 10여 명의 일행이 보현사 경외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러 왔다. 우리가 주뼛주뼛하며 비켜주니 신랑의 친구로 보이는 사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어온다. 그들도 이방인인 우리와 기념으로 촬영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덥썩 다가가 축하한다며 무리에 합류해 잠시 북한 결혼 문화를 읽기도 했다.

묘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석가여래탑.석가여래탑.북한 국보 144호이다.
묘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석가여래탑.석가여래탑.북한 국보 144호이다.

보현사 경내로 들어갔다. 돌을 팔각형으로 다듬어 13층으로 쌓은 팔각십삼층석탑(북한 국보 제144호)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뒤편으로 대웅전이 있고 그 곁에는 다보여래상을 안치했다하여 불리는 다보탑이 많은 석물들과 함께 있었다. 절의 사적을 기록하고 돌에 새긴 '보현사비'는 전쟁의 흔적인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968년(고려 광종 19년) 창건한 보현사에는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사찰이자 북한국보유적 40호'라는 팻말이 있었다. 탐밀과 굉학, 두 스님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호국불교의 유적이기도 했다. 서산대사의 유품인 철모와 칼, '육환장'이라는 은행나무 지팡이가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서산대사가 승병을 조직했던 향루봉 중턱의 금강암자
서산대사가 승병을 조직했던 향루봉 중턱의 금강암자

스님을 따라 법당으로 들어갔다. 바닥은 두툼한 원목에, 천장은 단아한 단청 그대로였다. 금색 불상 뒤로 선 벽에는 불화들이 석가의 이야기들을 머금고 있었다. 전쟁통에도 1천 년을 버틴 보현사 목조 건물은 우리가 오기를 기다린 양 온갖 유물을 자랑하고 있었다. 보현사에는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인쇄본 6천793권이 보존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보현사 뒷산으로 눈을 돌렸다. 호국 스님인 탐밀의 이름을 딴 '탐밀봉', 서산대사를 뜻하는 '탁기봉', 묘향산을 대표하는 주봉인 '비로봉'에 '진귀봉', '형제봉' 등이 기세를 뽐냈다. 쭉쭉 뻗은 절경에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림으로든 말로든 형용할 수 없는 묘향산을 어찌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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