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왕의 남자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역사와 인간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며 한국사 속의 간신(奸臣)을 책으로 펴낸 역사학자 함규진은 그 유형을 3가지로 나눴다. 왕의 신임을 믿고 권력을 농단했던 유형, 왕보다 더한 권력을 추구했던 유형, 시류에 영합하며 일신의 영달만을 꾀했던 유형이다. 그는 첫 번째 유형을 '왕의 남자'라 부르며 삼국시대의 도림, 고려시대의 묘청 그리고 조선시대의 홍국영 등을 대표로 꼽았다.

고구려 장수왕의 밀명을 받고 백제로 잠입한 승려 도림은 개로왕의 환심을 산 후 국사(國師)가 되었다. 그는 각종 토목공사를 건의해 백제의 국력을 낭비하며 백성을 곤궁에 빠트렸다. 그때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과 일가족을 붙잡아 죽였다. 어느 역사가는 도림 같은 인물을 일컬어 '역사를 훔친 첩자'라고 했다.

고려 인종 때 묘청은 서경(평양) 천도와 함께 황제국을 자처하고 금(金)을 정벌하자고 주창했다. 당시 고려 사회는 외척의 반란에다 문벌 귀족과 신진 관료의 대립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있었다. 더구나 대륙에는 여진족의 나라가 흥기하며 고려를 핍박했다. 개경 귀족에게 환멸을 느낀 나머지 허황된 정치적 수사에 현혹된 왕은 결국 '묘청의 난'을 초래했고, 머잖아 무신정변과 함께 왕조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조선 정조시대 초반의 정국은 홍국영이 전부였다. 모든 정사가 그에게서 나와 그를 통해 시행되었다. 외모가 준수하고 정무 감각이 뛰어난 그가 일찍이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조정 중신들 사이에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될 정도였다. 재야 선비들의 환심을 사고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인 홍국영의 독단적 권세는 그러나 정점에서 꺾이고 말았다. 도성에서 쫓겨나 폭음과 통곡으로 밤낮을 보내던 그는 30대 초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일개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를 둘러싸고 이렇게 온 나라가 들썩이는 것은 그가 곧 권력의 실세이자 '왕의 남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칠 줄 모르는 의혹과 표리부동의 행각에 '조로남불' '조국캐슬'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자고로 간신이란 어리석은 권력자를 숙주로 삼는다. 역사상 충신과 간신을 구별할 줄 모르는 리더가 이끄는 조직과 국가의 말로는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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