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순서〉
〈1〉경술국치, 안동인들의 자정순국과 선택
〈2〉안동·안동인, 만주 항일의 중심에 서다
〈3〉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년, 안동인들의 활동
〈4〉임청각, 바로잡는 민족정기
〈5·끝〉임청각, 되찾아야 할 역사
경북 안동인들은 만주 항일운동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규합과 항일무장투쟁,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에서 빠짐없이 참여해 사실상 대한독립의 해외 전초기지를 꾸려냈다.
안동인 일송 김동삼과 석주 이상룡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안동의 유림들은 대한제국의 주권과 독립의 의지, 일제강침을 지구촌에 알리기 위한 '파리장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 그렇게 치욕의 세월이 흘러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타올라 전국으로 번진 만세운동 소식에 만주로 떠나지 못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동생인 만지 이상동 선생은 조용히 준비에 나섰다.

◆이상동 선생 1인 시위
1919년 3월 13일 안동장날을 맞아 55세의 이상동 선생은 태극기를 그린 종이 방패연을 가슴에 품고 삼산동 곡물전 앞에 나섰다.
이 선생은 사람들이 가장 많은 오후 5시 30분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가슴에 품었던 태극기를 흔들면서 연신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내달렸다.
이 선생은 붙잡혀 압송되는 과정에서도 "상제(上帝)의 뜻과 가호에 의해 한국은 10일을 넘기지 않아 독립될 것이며, 지금은 감옥에 들어가지만 출옥은 시간문제"라고 외치며 자동차 위에서도 만세를 불렀다.
이 선생이 1인 만세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잡혔다는 소식은 안동지역의 만세운동에 불을 지폈다. 안동 만세운동은 같은 달 27일까지 총 14차례에 걸쳐 경북 내에서 가장 많은 1만 명 이상 참가한 대규모 운동이었다.
당시 18일 정오쯤엔 기독교인 30여 명이 이 선생이 외쳤던 안동면 삼산동 곡물전 앞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 14명이 체포되고 시위 군중은 해산됐다. 그러다 오후 6시쯤 기독교인 6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재개했다.
1919년 3월 23일 이곳에서는 3천여 명의 시민이 모여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는 이튿날 오전 4시까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수비대가 실탄을 발사해 군민 30여 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군민 참여한 안동면 시위
안동면 3·1만세운동 의거는 안동교회와 지역유림에 의해 두 갈래로 준비됐다. 예비검속을 면한 김재명의 아버지 안동교회 김병우 장로와 김익현·김계한·황인규·권점필·이인홍 등은 거사를 서두르자고 의논하고, 3월 18일(음력 2월 17일) 장날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송기식을 비롯한 류동붕·송장식·송홍식·권중호·문소원·이종록 등 지역유림과도 시위를 논의했다. 특히 이 시위는 하루 앞인 17일(음력 2월 16일 장날)에 일어난 예안시위에 의해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의거 당일 정오쯤 기독교인 30여 명은 안동면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과 농협안동지부 중간 지점) 앞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쓰인 깃발을 앞세우고 남문통과 북문통을 오르내리며 시위를 벌였다. 또 동문통에서 또 송기식 등 유림 시위대가 내려와 합세했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 14명이 체포되고 시위 군중은 해산됐다. 하지만 오후 6시쯤 기독교인 6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재개했다.
밤이 되자 시위 군중은 더욱 많아져 19일 0시 50분쯤에는 2천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안동면의 인구가 5천502명이었는데 노약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면민이 참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일제 통치기관인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 가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돌을 던지고 일부는 불을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수비대의 사격으로 해산됐다. 당시 안동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129호 495명이었다. 이들은 안동면 2차 시위 후 자위단을 조직하고 탄압에 가담했다.
3월 23일 오후 7시 30분쯤 시작된 3차 시위는 안동군의 다른 면민들이 대거 참가한 군 전체적인 시위 양상을 보였다.
3천여 명의 군중은 "경찰서와 법원 안동지원을 파괴하고 구금된 자를 구출하자"는 구호와 함께 두 기관으로 밀고 들어갔다. 수비대가 공포탄을 쏴 위협했지만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수비대는 실탄을 발사해 군민 30여 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군중은 인근 산으로 철수해 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그 때가 3월 19일 오전 4시쯤이었다.

◆김동삼·이상룡, 임시정부 참여
100년 전이었던 1919년 4월 10일 밤, 임시정부 설립 주체인 임시의정원은 밤을 세워 10개조 이루어진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심의했다. 날이 밝아 4월 11일 오전, 임시의정원은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헌법을 제정·발포하고,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정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기념비적 역사 가운데 안동인들의 활약은 빛났다. 안동 출신의 김동삼은 첫 임시의정원 회의 때부터 참가해 '대한민국 임시헌장' 구성에 함께 했다. 이후 김응섭 선생도 의정원 회의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활동이 약화되자, 독립운동계는 새로운 길을 찾고자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나라 안팎에서 130여 명의 대표가 참석했고, 5개월이나 지속됐다. 독립운동사에서 최대 규모이자 가장 오랫동안 진행된 이 회의에서 김동삼이 의장으로 선출돼 회의를 이끌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활동한 안동인으로는 의장인 김동삼을 필두로 시베리아 지역 대표 김응섭, 한족회 대표 김형식, 길림교육회 대표 류시언, 서로군정서 대표 이진산 등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마땅한 길을 찾지 못하자, 임시정부는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탄핵하고 후임에 박은식을 뽑은 뒤 헌법을 고쳐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를 채택했다.
수상에 해당하는 첫 국무령으로 안동인 석주 이상룡 선생이 취임했다. 만주 독립운동의 최고 인물을 받아들여 임시정부를 살려 보려는 뜻이었다.
국무령에 취임한 이상룡은 남북 만주 3부(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핵심 인물과 함께 출신지를 골고루 헤아려 조각(組閣)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1926년 봄 국무령 직책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이후 임시정부가 13년간 머물던 상해를 떠나 8년 동안 항주·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 등 힘겨운 이동 중 전시체제를 갖춰가는 과정에서도 안동인들의 참여는 끊이지 않았다.
홍종민 선생 등이 낙양분교에서 장교로 육성됐다. 이 시기에 안동 김상덕·김원식 선생은 임시정부 주변 정당조직인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해 활동했다. 이후 1940년 중경시절 임시의정원 경상도 위원으로 안동인 류림이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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