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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거래된 정의/ 이명선·박상규·박성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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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거래 피해자들 목소리 담은 책, "사법부가 인권 최후의 보루로서 제 역할 해야"

이명선·박상규·박성철 지음
이명선·박상규·박성철 지음 '거래된 정의'

권력을 비호하는 사법 세력에 대해 국민들 불신이 크다. 양승태 사법부가 박근혜 정부의 국정 부담을 줄이고자 '상고법원' 도입을 추진하고, 정부에 불리한 재판 일정 또는 판결을 쥐락펴락한 '사법 농단'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책은 그간 공공연히 벌어진 '재판 거래'의 피해자들이 그들 스스로 철썩같이 믿던 법 앞에 얼마나 무참히 무너졌는지를 고발한다.

◆국가배상금 줄이려던 양승태 사법부, 애꿎은 피해자들

법원의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국가가 배상토록 한 '국가배상 청구'. 이 제도의 청구 시효가 국가의 과실 사례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고 줄었다. 2011년 9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지연이자 기산점을 늦춘 일을 기점으로 법원 내 분위기가 '국가배상금 줄이기'로 바뀐 것이다.

취임 전 과거사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했으나 정권은 오히려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거나 피해자들에게 부당이득 반환 소송을 제기, 배상금 규모를 줄이거나 가져간 배상금을 빼앗아가기까지 했다.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법부가 정권의 국정 운영 부담을 줄이고 충성하려 '재판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나왔다.

이외식(사진 오른쪽) 씨와 둘째 아들 정도곤 씨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정재식 씨가 대구 10월 항쟁에 가담한
이외식(사진 오른쪽) 씨와 둘째 아들 정도곤 씨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정재식 씨가 대구 10월 항쟁에 가담한 '빨갱이'로 몰려 학살된 지 60여 년만에 1심 국가배상 판결을 받았으나, 정부가 항소하고 대법원이 판단을 달리 한 탓에 배상금 대부분을 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박상규. 후마니타스 제공

이외식과 그 가족은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피해자 중 하나다.

1949년 5월, 이외식은 무고한 남편 정재식이 '대구 10월 항쟁'에 가담한 '빨갱이' 누명을 쓰고 왜관경찰서에 끌려가 학살당한 뒤 그 또한 '빨갱이 아내'로 살았다. 60년 만인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로 국가 책임소재가 드러났고, 2012년 이외식과 둘째 아들은 부산지법에 국가 손해배상 소송을 각각 제기, 1심에서 모두 승소했다.

그러나 정부가 배상금 약 6억원을 줄 수 없다며 항소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인 2013년 부산고법은 "사망자의 당시 수입을 정확히 산정할 수 없고, 지연이자도 2012년 1심 변론 종결일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며 손해배상금을 대폭 삭감했다.

이듬해, 이외식의 최종심을 맡은 대법원 제2부는 2심 판결을 그대로 인정했으나 비슷한 시기 둘째 아들 최종심을 담당한 대법 제3부는 오히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이 훨씬 지났다'는 납득 못할 이유로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후 양승태 사법부의 법원행정처가 2015년 7월 31일 작성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문건에는 "(대법원은) 대통령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부당하거나 지나친 국가배상을 제한하고 그 요건을 정립했다"고 기록됐음이 드러났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하나인 이춘식 씨는 일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양승태 사법부의 대법원이 재판 일정을 늦추는 바람에 6년 여 만에 확정 판결을 받았다. 함께 소송을 제기한 다른 피해자 3명은 모두 별세했다. ©주용성. 후마니타스 제공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하나인 이춘식 씨는 일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양승태 사법부의 대법원이 재판 일정을 늦추는 바람에 6년 여 만에 확정 판결을 받았다. 함께 소송을 제기한 다른 피해자 3명은 모두 별세했다. ©주용성. 후마니타스 제공

◆사법농단 폭로 그 후… 한계 지목

책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청년 시절부터 최근까지 행한 재판거래 탓에 사회적 약자 71명(이 중 14명 사망)이 보통의 삶을 잃은 채 어떠한 고통을 받았는지 3년 간 취재해 조명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그 모든 사건에 연루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삶은 어떠했는지 대조한다. 피해자 다수가 여전히 투쟁 중이며, 일부는 이미 세상을 등져 친구나 가족이 그를 대신해 싸우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20대 이른 나이에 사법권력을 쥐고서 그 최고층까지 승승장구하다 말년에야 구속 수감됐다.

책은 '사법 농단'이 드러난 이후, 그에 가담한 당시 대법원장이나 행정처 판사들 개인의 일탈과 그들의 처벌 여부만 주목받는 반쪽 결과에 그쳤다고도 지적한다. 사법부가 지닌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고자 법관의 직무 수행에 대한 헌법 차원의 기준이나 선례를 마련했어야 하나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책은 사건 폭로 직후 대법관 전원이 두 번에 걸쳐 발표한 입장문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했다.

저자 박성철은 "2018년 1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관련해 수십 건의 문건이 나왔다. '재판 거래'가 의혹에만 그칠 상황이 아니었다"면서 "그럼에도 대법관 13명은 '사법부의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에 관한 불필요한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명한다'고만 발표했다"고 지적했다.

'진실탐사그룹 셜록' 구성원인 기자, 변호사 출신 저자들은 사법부가 인권 최후의 보루로서 제 역할을 하길 바라는 이들과, 무엇으로도 원상회복할 수 없는 사법 피해자들을 위해 행동하고자 이 책을 썼다. 392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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