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오영희 씨의 아버지 오세춘

"남들 간다고 X지게 지고 장에 가면 안 된다"
밥상머리 가르침이 위기 극복 결정적 영향

아버지 오세춘씨의 젊은 시절. 담뱃대를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호탕하게 웃고 있다.
아버지 오세춘씨의 젊은 시절. 담뱃대를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호탕하게 웃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학산 숲길을 간다. 이 작은 산에도 가보지 못한 길이 얼마나 많은지 호기심이 일어 안가본 길을 선택한다. 살짝 두려움이 일어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 라면 뭐라 하셨을까 궁금해 하며.......

한여름 뙤약볕 신작로를 가는중이다. 소를 몰고 100리를 걸어가고 있는 아버지와 딱 마주쳤다. 느닷없는 마주침에 아버지한테 뭐라고 할말이 없어 고개만 이리저리 흔들다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왜 인사를 안해 아버지한테 내외를 하는거야" 하며 크게 나무라셨다. 다음날 종아리에 빨간 피멍이 들도록 흠씬 맞았다. 이후로도 약속을 안 지키거나 거짓말을 할 때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드셨다


너무 무섭기도 하며 두려움의 존재였던 아버지가 속으로는 따듯한 분이라고 느꼈던 일이 있었다.
한여름 별이 총총히 뜬 여름날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군대간 오빠의 편지를 읽곤했다. 아버지는 항상 "영희 목소리가 참 좋아 또랑또랑하게 잘도 읽어"하고 칭찬해 주셨다.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건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는데 어깨가 으쓱하고 자신감이 생겼던 것도 그즈음 부터인 것 같다. 아마도
지금 시낭송가의 길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것 같다.

어느날은 아버지가 자가용처럼 아끼는 자전거를 몰래 훔쳐서 타고 가다 논두렁에 곤두박질 친 일이 있었다. 손바닥 인대가 늘어났는지 아픈 곳은 아랑곳 없이 혼날까봐 불안한 생각밖에 없었다. 나는 헝겊에 기름을 묻혀 자전거 살 하나하나를 깨끗하게 닦고 원래 있던 자리에 갔다두었다. 그날 저녁은 목구멍으로 밥이 잘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심히 한마디를 하신다. "자전거 타다 넘어지던데 다치지는 않았냐 원래 뭘 배우려면 넘어지면서 배우는거다 아무것도 안하면 못 배우지" 말한마디 못하고 불안에 떨던 나는 그만 닭똥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고 말았다.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 주시는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졌다.

아버지는 항상 밥상머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시곤했다.
특히나 하신 말씀은 "남들이 시장간다고 똥지개 지고 따라가면 안된다"는 이야기였다. 어디든 똥지개 지고 따라 갈 수 없는 처지이고 보니 소풍을 가거나 수학여행을 갈때도 왜 가야 하는지에 구구절절이 지겨운 설득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 말씀은 내 삶에 가장 위기가 닥쳐왔을 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며 무엇이 나다운 길인가에 대해 안내해 주었다. 아버지의 삶속에서 하신 잔소리가 어느새 깊숙이 세뇌 되어 있지는 않았을까 한다.

엄지 발톱이 빠지도록 청년들과 함께 축구장을 뛰던 열정적인 모습과 생일상에 빨간 넥타이와 양복입고 폼생폼사하시던 모습.

가파른 숲길을 지나 소나무 그림자 그윽한 곳에서 아버지 오세춘을 그려본다

오영희 나다음에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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