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박언휘 종합내과의원 원장 모친 故 장세철 씨

박언휘 종합내과의원 원장의 모친 故 장세철 씨가 15년 전 남편 故 박상광 씨와 고향 울릉도에서 찍은 사진. 가족제공.
박언휘 종합내과의원 원장의 모친 故 장세철 씨가 15년 전 남편 故 박상광 씨와 고향 울릉도에서 찍은 사진. 가족제공.

어머니. 하늘에서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봄비는 제 두 눈을 적시더니, 시야를 가리면서 어느새 가슴속으로 스며듭니다. 고향 울릉도에도 하얀 눈이 녹아서 봄비가 오겠죠. 최근 코로나로 얼어버린 몸과 마음은 아직도 고향의 동백꽃처럼 겨울 눈 속에 갇혀있는 듯하네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도 10여 년이 되었지만, 저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희미한 빗발 속의 거리 풍경은, 나를 몽유병 환자처럼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거리로 나서게 한답니다. 소리 없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나는 유년 시절의 어머니가 무척 그립습니다.

거리의 수많은 상점을 지나 보석상을 지나노라면, 갑자기 걸음이 더뎌지면서 문도 열지 않은 상점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빈 손가락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유년 시절을 외딴섬에서 보냈습니다. 울릉도에는 겨울이면 눈이 어찌 그리도 많이 내리던지... 차곡차곡 쌓이던 눈은 겨울방학이 되기도 전에 아이들의 키를 넘었고 지붕까지도 덮었던 그런 곳이었죠. 그렇게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살았는데,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육지로 나오던 날, 어머니는 빨갛게 피던 동백꽃을 꺾어 오셨어요.

"언휘야, 넌 틀림없이 이 동백꽃처럼 얼지도 시들지도 않고 예쁘게 꽃을 피우게 될 거야."

맏딸을 육지로 유학 보내신 어머니는 매일, 보이는 곳마다 물을 떠 놓고 기도하셨죠. 그사이 저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거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하면서도 약을 잘 못 먹는 저를 위해 겨울이면 감기에 특효라며 누렇게 잘 익은 호박으로 만든 엿을 보내주셨고, 여름이면 고향의 특산물인 감자떡을 손수 만들어 오셨다. 소풍만 갔다 와도 코피를 흘려댔고, 그 코피마저도 무서워 울던 내가, 의과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다.

유난히 멋 부리기를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양쪽 장지에는 항상 예쁜 금반지가 끼워져 있는데, 물론 육지에 나오실 때도 손가락에는 어김없이 그 반지들이 반짝였다. 먼 훗날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반지를 기꺼이 우리 손에 쥐여 주셨다. 한 번도 반지를 뺀 적 없던, 생일선물로 아버지가 해주셨다던, 그 반지였다. 나는 휴학을 했지만, 그 반지로 동생들은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어느 해 봄 어머니의 반지와 같은 모양은 아니었지만 작은 반지 하나를 선물해드렸다. 며칠 뒤 경주 큰아버지 댁에 잔치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곱게 차려입으신 모습으로 많은 사람 앞에서 왼팔을 번쩍 치켜 드셨단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쫙 펴고 흔드셨다고 한다. "이거 우리 딸이 해준 반지라네."라고 자랑하셨다.

그 반지가 어찌 자식을 위해 기꺼이 내어주셨던 그 눈 오던 날의 반지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어머니의 오른쪽 장지 손가락은 여전히 비어있었고, 나의 반지 찾기는 계속되고 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수년 전 겨울, 눈을 맞고 서서 반지 찾는 마음이 한없이 허허로웠다. 10여 년 전 여름, 똑같은 반지를 찾아내기도 전에 어머니가 먼저 우리 곁을 떠나셨다. "너만 믿는다. 우리 딸이 있으니 난 아파도 걱정 안 해."

내 손을 잡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아직 귓전에 그대로 있는데,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떠나시기 일주일 전 몹시 무덥던 어느 여름날, 바닷냄새가 그립다며 고향에 가셨다. 다음날 돌아오실 때 입을 옷을 차곡차곡 챙겨 머리맡에 두고 잠드신 어머니는, 영영 그 옷을 입지 못했다.

"엄마, 사랑해!!" 라고 고백하던 내게 "나도 널 하늘만큼 땅 만큼 사랑해." 마지막 말을 남기고 다시 못 올 곳으로 가셨지만, 나는 아직도 어머니를 보내지 못한 모양입니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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