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술 전시를 보기 위해 서울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로즈 와일리' 전시와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린 윤석남 작가의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 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전시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두 화가 모두 80세가 넘어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할머니' 화가들이란 점이다.
로즈 와일리는 1934년 영국 출생으로 올해 87세이다. 미술을 전공했으나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45세에 영국왕립예술학교에 입학, 뒤늦게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76세에 영국 가디언지가 뽑은 '영국에서 가장 뜨거운 신예 작가' 꼽히면서 국제 미술계의 슈퍼스타 할머니가 된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고 불리는 윤석남 작가 역시 1939년 출생으로 올해 82세. 그 역시 마흔이 넘어 화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뒤늦게 배운 채색화를 잘 그리고 싶어서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두 사람 다 마흔이 넘어 작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마흔이 늦은 나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다음에 나올 모지스 할머니가 코웃음을 치실 듯하다.
안나 모지스(1860~1961) 할머니는 농부의 아내로 살다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연히 미국의 유명 미술 수집가가 시골 약국에 들렀다가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80세에 첫 개인전시회를 가지며 명성을 얻는다.
할머니의 그림이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그녀의 100번째 생일은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정해지고, 평범했던 할머니는 미국의 '국민화가', '국민할머니'가 된다.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천600점의 그림을 그렸고 그 중 100세 이후에 그린 그림이 250점이란다.
루이 비뱅(1861-1936) 할아버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61세 은퇴 전까지 47년간 파리에서 우체부로 살았고, 은퇴 후 그동안 편지를 배달하며 눈에 새겨둔 파리의 풍경을 그림으로 기록하는데 전념한다. 그 역시 우연히 근처를 방문한 유명한 화상을 통해 65세에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루이 비뱅의 이야기는 최근 '루이 비뱅, 화가가 된 파리의 우체부'란 책으로도 출간되었다.
비단 미술계뿐만이 아니다. 20~30대가 점령한 패션계에서 당당하게 흰머리를 휘날리며 런웨이를 누비는 김칠두(67세), 최순화(78세) 시니어 모델, 세계적 유튜브 스타가 된 박막례 할머니(75세)도 있다. 장명숙 할머니(69세) 역시 유튜브 '밀라논나'를 통해 놀라운 패션 감각으로 많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가히 그레이네상스(Greynaissance)다.
인간에게 유한한 생이 주어졌고 그 안에 무한한 자유가 펼쳐져 있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노년이 되어서도 슈퍼스타를 꿈꾸며 성공을 위해 노력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미래에 저당 잡혀 노력하는 삶은 이미 충분했다. 모지스 할머니는 자서전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젊은 때이고,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라고 했다. 그래, 인생은 지금이다. 문구점으로 달려가 붓이라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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