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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인간만세

인간만세 / 오한기 지음 / 작가정신 펴냄

경북대 중앙도서관 북카페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매일신문DB
경북대 중앙도서관 북카페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매일신문DB
인간만세 / 오한기 지음 / 작가정신 펴냄
인간만세 / 오한기 지음 / 작가정신 펴냄

오한기 작가가 150쪽 분량의 소설 '인간만세'를 냈다. 서울 답십리도서관 상주작가 경험기가 토대다. 2017~2018년 그는 실제로 이곳에서 일했다. 작가의 보은인지 그는 도서관을 장편 시트콤같은 소설의 배경으로 차용하면서 답십리도서관의 이름을 크게 알린다.

오한기 작가 본인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상주작가의 1인칭 시점 소설이다. 소설 탄생 과정은 진지함과 거리가 멀다.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청탁에서 시작한다. 상주작가 임기를 마치기 전 경험을 살려 에세이를 써달라는 요청이었다. 에세이는 자신 없다고 거절하자 소설도 좋다는 답이, 소설가가 쓴 글은 기본적으로 빈정거림, 비아냥거림, 과장, 비논리가 뒤섞여 있어 국가정책 홍보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자 오히려 홍보라는 것을 티 내지 않는 게 문학다워서 좋다는 답이 돌아온다.

내용은 '인간만세'라는 제목이 잘 압축했다. 상주작가가 도서관에서 겪은 온갖 문화충격에서 정신승리하는 과정을 리얼리즘 구현이 살 길이라는 듯 그려냈다. 난무하는 도서관 갑질을 체험한 작가의 분투기가 소설로 승화한 듯 보일 정도다. 물론 판타지에 가까운 환청, 환시 등 소설적 장치도 드문드문 섞였다. 작가는 "울고 있는 인간이 억지로 만세하는 느낌"이라고 채널예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대구 수성구 범어도서관 전경. 매일신문 DB
대구 수성구 범어도서관 전경. 매일신문 DB

'진진', 'KC', '민활성'이라는 인물들이 작가의 정신력 앙양을 돕는다. 전직 은행원이자 2010년 신춘문예로 데뷔해 '미래돌연사'라는 장편을 하나 쓴 바 있는 '진진'이라는 상주작가 지원자가 우선 비중있는 악인으로 나온다. 다섯 살때부터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독했던 고향 도서관에서 상주작가로 일할 운명이었는데 학연에 밀려 물을 먹었다며 진정한 상주작가를 결정하자고 시비를 거는 역할이다.

그런데 이름이 눈에 익다. 2020년 오한기 작가의 현대문학상 후보작이었던 단편 '팽 사부와 거북이 진진'에도 나온 이름이다. 심지어 그가 현재 쓰고 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힌 '마름모 브라우니'의 늙은 개 이름도 진진이다. 이런 추세라면 가까운 시일 내에 진진 작가가 쓴 소설이 나오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기존 문법 질서를 깨부수는 오한기 작가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문학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문학은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거냐"는 질문 등으로 다른 회원들의 집단 탈퇴를 유도해 결국 혼자 남고 마는 지방국립대 화학과 교수 출신 고전소설 강독회 회원 KC는 또 어떤가. 작가는 아예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으로 그를 치환한다. 인간의 화를 돋우기 위할 목적으로 설계된, 작가군의 분노조절장애를 테스트할 목적으로 종합병원 정신과 따위에 상주하는 로봇으로.

강의용 마이크를 들고 달아난 초교생 민활성은 천지 분간 못하는 나이대니 넓은 아량으로 넘긴다손 쳐도 이후 행방이 묘연한 마이크를 분실한 작가에게 책임을 따져묻는 숨은 악당 도서관장도 갑질군 퍼레이드에서 빼놓을 수 없다. "마이크는 국가 예산으로 구입한 것인데, 내년에 진급 기회인데 마이크 때문에 진급에서 누락될지 누가 아냐"고 열을 올리는 워딩에서는 정말이지, '인간만세'라는 제목의 적절성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대구 북구 구수산도서관 전경. 매일신문 DB
대구 북구 구수산도서관 전경. 매일신문 DB

작가 본인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인물이 화자이다 보니 작가의 전작들, '상담'을 비롯해 '홍학이 된 사나이'와 '나는 자급자족한다'가 잊을 만하면 등장한다. 자연산 PPL처럼 적당한 곳에서 등장하기에 소설과 팩트의 중간단계처럼 자연스럽다. 정지돈 작가나 김희선 작가의 작품을 볼 때 비슷하게 경험한 것인데 소설을 읽다 보면 검색의 황제가 되고 있다는 걸 자각하는 증상이다.

예컨대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보며 건축가이자 조선의 황태손 이구의 인생사를 찾아볼 수밖에 없고, 김희선의 '공의 기원'을 보며 축구사를 뒤적이는 과정과 흡사하다. 단지 오한기 작가의 작품에 무방비로 반복 노출되다 보니 그 작품들을 읽고 싶어진다는 게 작가의 노림수로 읽힌다.

도서관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자료를 찾는 학생들의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매일신문 DB
도서관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자료를 찾는 학생들의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매일신문 DB

어디까지나 여기까지는 소설의 틀 안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답십리도서관은 실제로 '2018년 도서관 상주작가 지원사업 성과공유 워크숍' 시상식에서 우수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다만 다른 작가의 공이 크다고 답십리도서관은 홈페이지에 명시해뒀다. 어쨌거나 '인간만세'가 답십리도서관을 더 크게 알린 건 물론 상주작가의 존재감을 확실히 인식시킨 작품이라는 데 이견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8쪽,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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