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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술과 바닐라

술과 바닐라 /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펴냄

폭염에 물을 마시고 있는 참새들. 매일신문 DB
폭염에 물을 마시고 있는 참새들. 매일신문 DB
술과 바닐라 /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술과 바닐라 /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정한아 작가가 소설집 '술과 바닐라'를 묶어냈다. 2016년 발표한 단편 '할로윈'부터 올초 발표한 '참새잡기', 그리고 미발표작인 '고양이 자세를 해주세요'까지 7편의 단편을 실었다. 여간한 소설집이라면 대미를 장식하듯 늘상 있는 평론이 없다. 대신 작가의 속내를 더 잘 끄집어내는 조력자 염승숙 작가와 대담이 실렸다.

정한아 작가는 2005년 건국대 재학 시절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소년등과(少年登科) 이미지가 남아있기에 돌싱녀들이 대거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의 결에 당황할지 모른다. 어느덧 중년이 된 작가는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엄마 되기의 과정을 겪은 게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심지어 "전생과 후생이라고 나누어도 될 정도로 삶의 결이 달라졌다"고 했다.

호응하듯 "결혼한 여자의 삶은 독하면서도 부드럽고, 씁쓸한 동시에 달콤하다"는 도발적인 광고 문구같은 문장이 뒤표지에 적혔다. 결혼한 여자의 삶이 그토록 신산하단 말인가. 띠지에도 "기혼, 미혼, 그리고 비혼, 각기 다른 고독과 욕망을 자극하는 내밀한 긴장감"이라고 감아뒀다. 성대결 구도처럼 보이는 밑밥 깔기에 "다 읽고 나면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복창하게 될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범어도서관 야외정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요가 프로그램. 매일신문 DB
범어도서관 야외정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요가 프로그램. 매일신문 DB

그러나 각 작품으로 들어가 만나는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양상은 출판사의 말이 맞았다는 걸 입증한다. 작품 대개의 주인공들은 이혼과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혼여성들이 살며 겪는 선입견과 사회적 낙인, 세태를 보여주는 소설집이라고 해도 될 만큼이다.

그에게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을 안긴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이 대표적이다. 돌돌싱(두 번의 이혼)이 된 주인공이 아이(시원)를 낳고, 기르고, 자식으로서 능력을 입증하려 스스로를 다시 키우고, 아이와 함께 성장해가는 삶을 압축한 기록처럼 읽힌다.

작품 대부분이 처절하거나 우울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결단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혼과 무관한 단편인 '기진의 마음'에서도 그런 면은 확고하다. 기진은 눈뜨자마자 가족들에게 아침식사로 뭘 먹일지 생각하는 엄마였다. 그런 기진에게 '까임방지권'이 생긴 건 서른 일곱이던 2년 전 유방암 환자가 된 뒤. 오로지 자신에게 전력을 다해야하는 처지에서 살아내는 일상을 그린다.

기억 한 귀퉁이가 깜빡거리는 것, 괄약근 조절 난도의 급상승, 손발이 차가워지는 말초신경염 같은 게 흔히 항암 치료 부작용이라고 하지만 그쯤이야 암 재발이나 전이에 비하면 간지럽다고 할 만큼 사소한 증상이다. 층간소음 같은 앓는 소리들은 행복한 투정일 수 있는 것이다.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열린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열린 '조부모와 함께하는 행복한 육아교실'. 매일신문 DB

미발표작으로 함께 수록된 '고양이 자세를 해주세요'도 해피엔딩이다. 제목에서 짐작하듯 요가의 여러 자세, '살람바 시르사아사나(물구나무 서기)'라든가 '후굴(몸을 뒤로 구부리는 자세)'이라든가 '사바아사나(송장 자세)'를 비롯해 '고양이 자세(그나마 알아듣기 쉬운 자세)' 등이 중요한 순간마다 전환점으로 등장한다. 소설에는 필연적으로 작가의 마음 풍경이, 생활 풍경이 녹아들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소설에서 전남편의 고향으로 대구가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이혼 수속도 각자 놀이터에 나왔다가 엄마가 불러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처럼 깔끔하게 헤어진 주인공은 세종시로 추정되는 행정수도 S시에서 계약직 공무원으로 일하다 이혼 후유증으로 면직당한 뒤 생긴 부작용으로 배달음식을 폭풍 흡입하게 되는데 재빠른 후회로 다이어트를 겸해 예전부터 해왔던 요가를 다시 시작하면서 대학 때 친구인, 전형적인 못생김을 가져 남자친구가 될 가능성이 1도 없던 미혼남성 정우를 만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홀로서기 가이드로 읽히는 작품이다.

마지막에 실린 '할로윈'도 이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긴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이 역시 주인공이 유부남과 딴살림을 차리고, 뒤통수를 맞고, 심지어 이야기의 시초가 되는 인물인 할머니가 혼외자식을 둔 것이 곧 드러나 충격파는 더 세다.

소설집 뒤편에 평론 대신 대담을 엮은 것은 독자와 눈높이를 맞추려는 시도로 보인다. 어떻게 해석해야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게 아닌 공감의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77쪽, 1만3천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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