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향 작 'Layers of Moments' 먹, acrylic on canvas, 259.1X193.1cm
십대 시절 무협지 꽤나 읽었다. 무협지 주인공들의 행보는 대개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과 맞닥뜨리게 되고, 여정 중에 기이한 인연을 맺거나, 험지 속에 빠져 헤매던 중 아주 오래 전 무림고수가 남긴 비급(祕笈)을 얻어 절대 강자가 되고 집안의 원수를 갚거나 무림의 평화에 앞장서는 영웅으로 거듭난다. 특히 무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절대고수로 가는 마지막 관문은 이제까지의 모든 초식(招式)을 잊고 자연의 운행에 맞춰 춤을 추듯 칼이나 손발을 허공에 휘두르는 경지에 다다라야 비로소 모든 무공의 장르를 초월한 '절대 지존의 무예'를 완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술사에서도 자신의 예술을 '절대주의'라고 부르며 예술의 독립성을 강조한 화가가 있다.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회화가 물질의 세계에서 해방돼 회화만의 고유성을 가져야 한다면서 화면에서 대상을 모조리 없애고, 실험을 거듭한 끝에-무협 주인공이 비급을 연마하듯이-가장 완전하고 순수한 형태인 정사각형만을 화면에 남겨 두기도 했다. '흰색 위의 흰색' '검정 사각형'이란 작품이 그것이다. 이들 그림을 보면 문득 반야심경 속 '색즉시공' '공즉시색'처럼 모든 형상은 일시적일 뿐 진정한 실체는 정말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손치더라고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적 표현은 솔직히 말해 감상하기 불편한 점이 없지 않다. 흔히 마티스나 피카소도 회화를 자연 재현의 기능에서 해방시켰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작품에는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대상이 있어 보기에 거부감이 없었는데 말이다.
조미향 작 'Layers of Moments'는 어떤가?
작가는 캔버스 앞에 서서 어떤 예정된 대상이나 목적을 부여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붓이 가는대로 손을 내저어 작가의 내면에 있는 즉흥성 또는 역동성에 의지해 그림을 그렸다. 화가의 의도가 아닌 그림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걸 형상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조미향이 붙인 그림 제목은 그래서 '순간의 층위들'로 의미해석이 가능하다. 강약을 강조하면서도 면에 가까운 선들의 다양한 붓질은 이른바 작가적 무의식의 통로이다. 노랑, 청색, 녹색, 회색, 검정의 색채에도 어떤 의미를 담기보다 그냥 그것들만의 수다스러움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이 중 어떤 색이 먼저 칠해졌고 어떤 색이 나중에 칠해진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서로의 선이 교차되는 지점에 드러나는 불협화음마저도 화면의 전체의 변주로서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빠른 붓질로 인해 물감이 선을 타고 중력에 못 이겨 일부 흘러내리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다른 색들은 모두 아크릴 물감인데 유독 검은 색만은 먹을 사용했다. 짙게 갈아진 먹만큼 검정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마티에르는 없다. 조미향은 이런 점을 노린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각각의 색들은 나름의 층위를 이루면서 서로 연결돼 그 연기(緣起)적 구조 속에서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다.
"땅 아래 두더지의 몸짓과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궤적처럼 서로 무심하지만, 함께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을 나는 그리고 싶습니다."
작가의 이런 회화적 지향점은 화면 위에 드러난 색과 선들로 이뤄진 '순간의 층위들'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생물-인간도 포함-들을 묘사하는 '존재의 층위들'로 바뀌는 출발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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