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에게 가장 신뢰하는 정부조직을 꼽으라면 단연 연방대법원을 꼽는다. 연방대법원은 우리로 치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합친 역할을 수행한다. 9명의 대법관들은 종신직이며, 양당제가 정착된 미국의 특성상 대부분 정당에 소속되거나 뚜렷한 이념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때로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지만, 연방대법원은 미국 법치주의의 보루이며, 신뢰와 안정감의 상징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필자는 검사 재직시 맨해튼에서 유학 생활을, 워싱턴 DC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는데, 미국이 위대하다고 느낀 것은 맨해튼의 마천루나 펜타곤의 위엄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치밀하며 외국인에게까지 공정한 판결문을 읽을 때였다.
건국 당시 연방의회 의사당 한구석에서 출범했던 연방대법원이 현재의 위상을 가지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수치스러운 판결로 기억되는 흑인이나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적 판결 등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연방대법원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때로 타협했던 역사와 연방대법원의 권위와 존경을 유지하기 위해 대법관들이 기울인 노력에 대해서 살펴보자.
연방대법원은 1803년 마버리 대 매디슨 사건(Marbury v. Madison)을 통해 위헌법률심사권한을 확보했다. 연방파였던 2대 아담스 대통령과 의회는 퇴임 직전에 법원법을 통과시켜 연방판사 정원을 늘린 후, 전원을 연방파로 임명하고 대통령 서명까지 했다. 미쳐 임명장을 받지 못한 마버리 등은 임명장 교부를 거부하는 매디슨 국무장관을 상대로 대법원에 임명장의 교부를 명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제퍼슨 대통령은 대법원이 명령을 내려도 거부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연방대법원은 국무장관의 임명장 교부 거부는 불법이지만, 마버리 등이 명령 발부의 근거로 삼은 법원법 조항이 헌법에 정한 대법원의 관할을 넘어서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판단함으로써 형식적으로 대통령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이후 연방대법원의 사법심사권한을 확립한 것이다.
그 후 대통령과 연방대법원의 갈등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때 최고조에 달했다. 루스벨트는 경제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야심적인 뉴딜 법률들을 통과시켰는데 연방대법원이 계속 위헌을 선고하자 격앙하여 대법관 증원(court packing)을 시도했다. 위기 상황에서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던 루스벨트는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법관 증원을 밀어붙였으나 헌법개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고, 연방대법원이 나중에는 뉴딜 법률에 대해 합헌을 선고하는 선에서 양측의 싸움은 끝났다.
대법관 증원 문제가 요즘 다시 대두된다. 오바마 당시에도 보수파가 5대 4로 우세했지만, 오바마의 기념비적인 건강보험개혁법에 대해 보수파인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5대 4 합헌 판결에 동조하는 등 균형을 취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임기 말에 진보의 아이콘 긴스버그 대법관 사후 보수색채가 강한 배럿을 대법관에 임명하자, 민주당 지지자들은 대법관 증원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바이든은 대법관 증원이나 임기제 등에 대해 검토했지만, 헌법개정이 필요한 문제여서 사실상 불가능하다.
연방대법관들은 대법원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전통을 중시하고, 공식석상에서 서열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평의 시에는 신참 대법관이 직접 문을 여닫는 등 심부름을 한다. 그리고 평의에 대해서도 절대 보안이 지켜져 언론에 미리 보도되지 않는다. 판결문을 보면 서로 독하고 날카롭게 비난하지만, 사석에선 서로 존중한다.
긴스버그 대법관과 보수의 거두 스칼리아 대법관의 우정은 널리 알려졌다. 이런 모습이 미국인들에게 연방대법원의 신뢰와 권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반면에 우리는 대법관 사이의 불화가 가끔 노출되기도 하고, 최근에는 권순일 전 대법관이 계류 중인 사건 관련자와 수차례 만나고 퇴직 후 그 회사로부터 거액의 자문료를 받아 논란이 되고 있다. 유전무죄가 대법원에도 통한다는 인상을 줄 것 같아서 심히 염려된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