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1일 개봉한 '라스트 나잇 인 소호'(감독 에드가 라이트)는 화려한 미장센이 돋보이는 스타일리시한 공포영화다. 아름다운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심리 스릴러로 그리다가, 호러의 비주얼로 깊숙이 관객을 끌고 간다. 꿈꾸던 시대의 추악함을 맞닥뜨린 주인공의 혹독한 악몽 체험을 몽환적으로 그려낸 독특한 영화다.

배경은 1960년대와 2020년대. 공간은 런던의 고풍스러운 소호 거리다. 현재에서 과거의 환영을 꿈꾸는 이야기 플롯이다.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가진 엘리(토마신 맥켄지)는 현재에 살지만 1960년대를 동경하는 특별한 소녀다. '조조 래빗'(2019)에서 유대인 소녀로 나온 토마스 맥켄지는 맑고 순수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런던에 와서 친구들과 섞이지 못하는 지점까지는 마치 청춘 판타지나 학원물처럼 상큼하다. 자살한 어머니의 환영을 보는 것만 빼면 이상할 것도 없는 10대 소녀.

스마트폰이나 아이팟이 아닌 레코드로 실라 블랙의 'You're my world'나 존 레논의 'A World Without Love' 등을 들으며 방의 인테리어도 1960년대 풍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의 오드리 헵번 브로마이드를 걸어놓고 표정을 흉내낸다.

드디어 꿈을 이뤄줄 소호의 패션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녀는 촌스러운 1960년대 아이였고, 주변의 모든 것들에서 이물질처럼 배제된다. 그러다 소호의 낡은 꼭대기 방을 얻게 된다. 네온 불빛이 강렬한 그 방에서 꿈을 꾼 듯 1960년대를 경험한다. 숀 코너리의 '007 썬더볼트 작전'(1966) 간판이 내걸린 화려한 소호 거리. 가수가 꿈인 금발의 샌디(안야 테일러 조이)를 만나면서 그녀의 삶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샌디를 만나면서 삶이 바뀌는 엘리. 샌디의 1960년대 풍 의상을 과제물로 제작하면서 패션 디자인 감각과 자신감도 상승한다. 하지만 곧이어 샌디가 추악한 남성들의 본능을 채워주는 도구로 전락하면서 엘리의 삶도 뒤틀리기 시작한다. 금발로 염색을 하고, 화장을 하며 소녀의 이미지는 사라진다. 이제는 꿈속에만 나오던 샌디와 일그러진 얼굴의 남성들이 일상에서도 나타난다. 마치 꿈속에 갇힌 것처럼 혼란스럽다.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에드가 라이트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베이비 드라이버'(2017)처럼 장르를 비틀어 새롭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한 감독이다. 기존의 문법과 다른 자신만의 영상언어로 호흡하면서 신선한 맛을 선사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환상을 체험하는 플롯이 신선한 것은 아니지만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는 비주얼에 공을 많이 들였다. 붉고 푸른 네온 불빛과 황홀한 스테이지 불빛, 불야성 같은 1960년대 거리가 점점 퇴폐적 이미지로 변질되면서 카메라 워크도 덩달아 주인공의 기이한 체험처럼 불안하게 관객의 긴장감을 조여 준다.

특히 거울을 통해 엘리와 샌디의 동시성을 묘사한 것은 정교하면서 섬뜩한 비주얼로 다가온다. 1960년대 샌디의 거울에 비친 엘리의 음영은 처음에는 화려한 미장센이지만, 갈수록 둘 사이 또는 시대의 벽이 되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이름이 뭐야?" 하룻밤의 정사를 꿈꾸며 남자들이 샌디에게 묻는다. 샌디는 아무 이름이나 말해준다. 샌디가 내뱉은 서로 다른 이름을 듣고도 모든 남자들은 "예쁜 이름이군"이라며 이구동성으로 접근한다. 이름이 뭐든 상관없이 오직 정사만을 향한 남자들의 말초적 저돌성을 잘 보여준다. 엘리에게는 의문의 백발노인(테렌스 스탬프)이 접근한다. 금발에 화려한 의상으로 바꾸자 그는 "엄마가 누구냐?"며 물으며 불안감을 던진다.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영화는 처음부터 복선을 곳곳에 배치한다. 그러나 1960년대 소호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관객 또한 너무 긴 당혹감에 휩싸이게 한다. 황홀했던 비주얼은 어지러운 혼란으로 바뀌고, 뒤틀린 현실감 또한 참신함이 빠진 기교와 테크닉의 수단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색다르면서 신선한 호러영화다. 서사와 비주얼에 배우들도 호연한다. 샌디 역의 안야 테일러 조이도 쿨한 퇴폐미를 잘 연기했고, 엘리 역의 토마스 맥켄지도 뜻하지 않게 나락에 빠져 고통 받는 역할을 잘 소화했다.

특히 비주얼에 몰두한 감독의 의도대로 영상미도 뛰어나다. '올드보이'(2003), '신세계'(2012), '아가씨'(2016)의 촬영감독이었던 정정훈 촬영감독의 솜씨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이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관람한 후 수려한 미장센과 디테일한 솜씨에 반해 러브콜을 보내 성사된 것이다. 정정훈 촬영감독은 디즈니+의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인 '오비완 케노비'에도 참여하는 등 할리우드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117분. 청소년 관람불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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