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 등의 법률과 조례 등을 제정하는 의회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기록'이다. 본회의와 상임위원회 회의 등 중요한 회의는 항상 기록을 담당하는 사람이 함께 자리해 회의 현장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기록한다. 입법의 현장 속에는 이를 기록하는 속기사가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요즘이야 컴퓨터로 의회의 속기록을 작성하지만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모든 기록을 손으로 써서 작성했다. 대구 달서구의회에서 31년간 속기록을 담당한 김영서(60) 의회사무국 홍보기록팀장은 대구지역 기초의회에 몇 남지 않은 '수기 속기사' 중 한 사람이다.
지방의회가 부활한 1991년부터 속기사 일을 시작한 김 팀장이 속기사라는 직업을 택한 동기는 우연히 본 속기용 문자 때문이었다.
"군대 제대하고 나서 우연하게 속기용 문자를 어떤 책에서 봤어요. 글자가 흡사 중동 지역의 문자처럼 생긴 게 재미있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지금까지 직업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는 지방의회가 부활하면서 속기사 인력 자체가 귀했던 시절이었거든요."
앞서 말했듯 수기 속기는 속기용 문자가 따로 존재한다. 손으로 글자를 하나하나 써내려가기엔 말의 속도를 손이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에 인사말 혹은 여러 어구들을 묶어 하나의 기호로 표시한 속기용 문자로 기록한다. 김 팀장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을 세로로 그은 선과 점 하나로 간단히 기록했다.

게다가 이 속기용 문자는 속기사마다 다르게 쓸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수기 속기사라도 자기가 쓴 것이 아니면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속기하다가 놓치는 경우에는 현장 녹음본을 듣고 보강한다.
속기용 펜은 적당한 볼펜을 쓰지만 속기용지는 갱지를 선호하는데 "살짝 까칠한 용지가 빨리 쓸 때 펜이 미끄러지지 않고 편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의회의 기록자로써 항상 빠질 수 없기에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발생한다. 회의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야 하다보니 간혹 생리현상이 발생하더라도 회의 끝까지 참아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김 팀장은 "도저히 못 참을 경우 회의 진행 담당자 등에 살짝 눈치를 주어 회의를 끊도록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또 회기 도중에는 함부로 아프지도 못한다. 1995년 속기사가 김 팀장 혼자였을 때 의회 회기 도중 심한 눈병에 걸려 병가를 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 하필 한 언론에서 "달서구의회가 속기사 없이 회의를 진행한다"고 지적한 기사를 냈고 결국 다음날 쿡쿡 쑤시는 눈을 안경으로 겨우 가리고 자리에 배석해 속기하는 척하고 나중에 녹음본을 듣고 속기록을 작성했던 적이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김 팀장은 1993년 지방의회속기사협회 창설 초기 멤버이자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속기사 간 업무 정보 교환과 권익 향상 등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래서 속기사들의 근무 환경에도 관심이 많다. 김 팀장은 "앞으로 회의 중간에 교대가 가능할 정도로 속기사 보충과 업무환경 개선이 이뤄진다면 의회의 기록이 더 빠르고 충실해질 것"이라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31년간 '사관'의 마음으로 속기사 업무를 해왔다는 김 팀장은 올해 연말 퇴직을 앞두고 있다. 김 팀장은 "개인적으로 일기 등의 기록등을 남겨서 지방의회 역사에 또 다른 보탬이 됐다면 좋았을텐데 그걸 못해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며 "역사를 기록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일했던 만큼 많은 속기사들이 같은 자부심을 갖고 일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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