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영화 ‘355’

영화 '355'의 한 장면. 스튜디오산타클로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영화 '355'의 한 장면. 스튜디오산타클로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한순간에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비밀무기가 발명된다. 악당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 요원이 나서고, 천신만고 끝에 악의 손아귀에서 지구의 평화를 지킨다.

이런 플롯은 첩보물의 단골소재다. 1960년대 첩보원 나폴레옹 솔로의 활약을 그린 '첩보원 0011'부터 시작해 익히 잘 아는 007 제임스 본드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 만화영화에서도 곧잘 써먹던 설정이다.

9일 개봉한 '355'(감독 사이먼 킨버그)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 플롯에 충실한 액션영화다. 크게 다르다면 여성 요원들로 이뤄진 첩보물이라는 점이다. 355라는 첩보원 코드 네임부터 이미 여성성을 내세우고 있다. '355'는 미국 독립전쟁 시기인 1700년대 활약한 첫 여성 스파이의 코드 네임이다.

'355'에 등장하는 비밀무기는 세상에 모든 시스템에 무단 침입할 수 있는 외장형 드라이브다. 비행기를 추락시키고, 도시 정전을 일으킬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은행이며 주식시장에 핵시설까지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어 만일 악당의 손에 들어가면 인류는 사상 초유의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콜롬비아 보고타 외곽의 한 마약상의 집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비행기를 폭파시키는 시연을 보이며 거래를 하는 순간 콜롬비아 DNI 요원들이 급습한다. DNI 요원 루이스(에드가 라미레즈)는 총격전 와중에 이 드라이브를 가로채고 CIA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CIA의 메이스(제시카 채스테인)는 동료 닉(세바스티안 스탄)과 함께 접선 장소인 파리로 향한다. 신혼부부를 가장해 접선을 시도하던 중 독일 BND 요원 마리(다이앤 크루거)가 끼어들면서 거래는 깨어지고, 닉이 사망한다. 그리고 드라이브가 사라지면서 이를 찾으려는 메이스의 단독 작전이 시작된다.

영화 '355'의 한 장면. 스튜디오산타클로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영화 '355'의 한 장면. 스튜디오산타클로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355'는 배우이면서 이 영화의 제작자인 제시카 채스테인에서 출발한 영화다. 그녀는 여성들로만 이뤄진 스파이 영화를 제안했고, '엑스맨' 시리즈의 제작자이자 '엑스맨: 다크 피닉스'로 감독에 데뷔한 사이먼 킨버그가 감독으로 합류했다.

첫 단추가 '여성 스파이물'이라는 것이기에 5명의 여성 캐릭터는 영화의 생명이나 다름없다. 메이스는 터프한 CIA 여성요원으로 '355팀'의 팀장이다. 마리는 독일 요원이고, 여기에 영국 MI6 출신 해커인 카디자(루피타 뇽오)가 메이스의 요청으로 합류한다. 중국의 기밀 요원 린 미성(판빙빙)에 콜롬비아에서 온 심리학자 그라시엘라(페넬로페 크루즈)가 가세하면서 5명은 지구를 지키는 비밀 에이전트팀이 된다. 백인, 흑인, 아시아인에 북미, 남미, 유럽에 아시아까지 각국의 요원들이 참여한 범인류적 글로벌 에이전트의 밑그림이 완성된 것이다.

서로 적이었던 그들이 독수리 5형제처럼 합심해 사건을 해결하면서 유대감을 가지는 것이 기본 플롯이고, 여기에 첩보물에 어울릴 이국적 로케이션에 다이내믹한 액션과 총격전이 가미되면서 액션물의 밥상이 차려진다. 빠른 편집과 역동적인 촬영, 타격감 넘치는 총격신은 익히 다른 영화에서도 보았기에 새로울 것이 없는 기술적 기본 반찬이고, 파리와 모로코, 상하이 등지에서 촬영된 로케이션 또한 신선한 재료가 아니다.

결국은 중견 여성 배우들이 등장하는 스파이물이라는 시놉시스뿐인데, 아쉽게도 이마저 상투적이며 진부함에 허덕대면서 어제 먹은 메뉴가 되고 말았다. 액션 파트의 메이스와 마리, 지원 파트의 카디자, 총격전 속에서도 딸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는 주부 그라시엘라, 뜬금없이 나타나 지구를 지킨다는 란 미성까지 5명 캐릭터를 피자 자르듯 지역과 역할로 배분한 인위적 구성은 영화 내내 하나로 녹아들지 못하고 산만함의 극치를 달린다.

남성 중심의 조직이 부패하고, 남자친구도 배신하는 판에 박힌 성 대결구도와, 하이힐에 옆 터진 드레스를 입고 경매장에 나타나서 액션을 벌이는 노출증 액션, 콜롬비아 밀림에서 마약상의 아들이 추적도 복사도 불가능한 가공할 첨단무기를 개발한다는 설정 등 개연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안이한 각본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악을 처단 후 "이제 우리는 외롭지 않다"며 5명의 캐릭터가 기둥 뒤에서 나타나는 장면은 60년대 서부영화를 보는 것 같아 실소를 자아낸다.

영화 '355'의 한 장면. 스튜디오산타클로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영화 '355'의 한 장면. 스튜디오산타클로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다만 총격의 타격감을 잘 느끼게 하는 음향효과와 독일 요원 마리역의 다이앤 크루거는 그나마 눈에 띄는 부분이다. 가볍게 여성 캐릭터의 총격과 액션만 보면 된다는 관객에게는 킬링 타임용으로 쓸모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시도는 좋았지만, 결국은 첩보물의 클리셰만 답습한 영화라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다. 첨단 로봇이 요리를 해서 식탁까지 배달해주지만 정작 맛이 없었다는 모 동계올림픽을 연상하라면 비유가 심할까?

김중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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