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들

안진나 훌라 대표

안진나 훌라 대표
안진나 훌라 대표

몇 년 전 청년문화정책워크숍에 연구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단순히 문화기획자, 예술가, 문화활동가라는 경계로 나눌 수 없는 다양한 문화청년들에게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를 고민하며 구체적 현장의 사례를 탐구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위해 문화예술지원사업이라는 체계의 변방에 등장하는 낯선 존재들, 새로이 신(scene)을 만들며 부상하는 문화청년들에 주목했다.

어떤 돌연변이들은 시간의 벽을 통과하여 결국 새로운 종의 출현으로 정의되듯, 이들 또한 기존의 문화예술 지원사업 체계의 경직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책의 영역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돌연변이들의 문화적 DNA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기존 문화예술 정책의 '경직성'을 넘어서는 '자기-참조' 조건을 만든다면 어떨까. 다른 지원사업체계가 갖지 못한 독특하고 유연한 체계로서 '문화예술'의 영향력과 정책적 파급력을 갖게 되지 않을까.

이러한 착상에 기인하여, 대구에서 다년간 문화적 활동을 해 오며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어쩌면 지역의 생존자들이라 할 수 있는 청년들과 각자 자기의 문화적 자양분에 축을 두고 자전하는 생애사 구술 인터뷰를 진행했다. 각자의 활동 배경과 동기, 도전과 결과들, 분화하거나 변화하는 시점, 지속하기 위한 동력, 수익 구조나 지원사업 등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통해 '지역살이의 계속 가능성'이라는 주제로 각자의 타임라인을 추적해 보았다.

이와 함께 사회적 영역에서의 실패와 성공, 그 경험의 연대기를 살펴보았다. 그들에게 지역은 무엇이고, 그들의 활동 동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어떤 사회적 가치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들의 삶을 미루어보건대 지역 문화청년들의 적정 생장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과 요소가 필요한지를 들여다보았다. 이들은 어느 영역에도 완전히 속했다고 보기 어려운, 경계를 오가며 스스로 문화적인 활동이라고 인식하기도 전에,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을 문화적 접근을 통해 풀어내 사후적으로 그것이 '문화기획' 또는 '문화활동'이었음을 인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긴 대학 시절/유예기/잉여기를 통해 주변 친구들과 다른 가치 추구의 갈림길에서 모호하지만 무언가를 모색하는 시간을 보냈다. 아이의 영혼은 느리고 의미 없는 시간에 그윽하게 먼 산을 보는 중에 성장한다고 한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이들은 느리거나 우회하는 방법을 택했을지언정 자신의 내면이 자라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배움을 정보 습득이나 이론 수업이 아닌 경험하는 기회를 통해 얻는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나 방향, 혹은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도 통할까 하는 사회와의 소통을 통해 그렇게 자기 확신의 시간을 통과하며 타인의 속도에 구애받지 않는 자기 리듬을 익혔고, 스스로 계속해 나가고자 하는 원동력을 만들어갔다.

어느덧 선거철을 맞아 우리 목전에 당도해 있는 선택 앞에서 우리는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 1년짜리, 3년짜리, 5년짜리 인생을 사는 게 아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길들여진 선택이 아닌, 필요한 시간에 대한 요구여야 할 것이다. 부디 지금 유예와 잉여의 시간을 보내며 영혼이 자라고 있을 또 다른 청년들이 박탈감으로 인해 상처 입거나 자신이 기여하는 문화의 가치로부터 배제당하지 않는, 지역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는 시간을 인정받는 길이 그 선택에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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