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마지막 지면을 무엇으로 채울까, 망설였다. 소재가 너무 많이 몰려와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다른 이의 글에서 소재거리를 찾았다. 물. 내게도 물과 관련한 이야기가 풍성했다. 헤엄치는 것을 좋아하고 외국에서 수영을 한 경험도 여러 번이며 마시는 물에 대한 에피소드도 꽤 길다. 하지만 같은 지면에서 다른 이가 이미 쓴 소재를 가져올 수는 없는데, 어쩌나.
그렇게 고민하다가 물만큼 흔하고 출렁이는 얘깃거리, 그러니까 꿈 혹은 환상으로 불리는 것이 떠올랐다. 환상은 물처럼 신비롭고 우리 누구나에게 꼭 필요하며 어떤 때에는 차고 넘쳐 사람을 다치게 하니까. 우리의 마음을 마구 밀고 당기는 중력처럼. 우주의 거시적인 힘 중에 하나인 중력은, 내면이 환상에 끌리는 비유로는 부적절하고 미약한 단어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비유가 그렇다 치고 얘기를 이어가볼까.
내가 좋아하는 꿈에 관한 이야기 하나는 호접지몽이다. 사는 게 힘들거나 마음 또한 너무 집착하여서 어떤 경계에 마주치면, 잠시 꼼짝 못하게 된다. 그때 위안이 되는 호접지몽. '장자가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아다니다 문득 일어나보니 꿈이더라는' 얘기. 원래 장자가 말한 뜻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는 삶의 벽 앞에서나 실패를 직감했을 적에 웃음이 난다. 장자의 나비를 읽었을 때처럼. 수많은 악몽에 시달리고 수치심을 견디면서도 나를 살게 한 건 바로 장자의 나비 같은 초월적인 개념들이다. 내 인식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은 나를 설득하지 못했으니.
어느날 원자를 설명하는 다큐를 보면서, 환상이 그 안의 진공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원자는 핵과 전자들로 구성돼 있는데 그 크기가 아주 작다. 나머지 대부분의 공간은 비어있다는 것이다. 비어있지만 원자를 원자이게 하는 주공간인 진공이, 사람이 가진 환상과 비슷해 보였다. 사람을 지탱하는 힘인 꿈과 환상.
공부방에서 만난 중학생 남자아이는 엄마랑 살지 않았다. 그러다 방학이 되어 잠깐 엄마와 지내다 돌아오면 자신의 현실을 부정했다. 엄마와 같이 살기만 하면 자신의 노력이 필요한 능력조차 최대치가 될 것처럼 여겼다. 주변 아이들의 엄마를 예로 들어 설명을 했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어려서 그런 것이라 포기했지만 환상의 힘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 세상의 이데올로기나 종교 또한 많은 환상에 기대지 않는가. 이쯤이면 환상을 믿는 사람의 상상력을 칭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람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지닌 능력과 지식 대부분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암묵지이고, 이는 언어와 논리 코드 형태로 변환하기 어려워서란다. 인공지능을 가르치면서 알게 된 우리, 사람이다.
이러해서 내게는 환상과 물이 비슷하게 여겨진다. 물이 몸을 감싸거나 밀어내는 느낌과, 공상과 현실의 경계에 선 아찔한 압박감. 더 검고 깊은 곳으로 유영해 가는 위험한 시도를 피하지만 가끔 그곳은 달콤하고 그리운 끌림이기도 하다. 소설가라는 유연한 말뚝을 핑계 삼아, 어쩌면 나의 호기심은 내가 갈 수 없는 곳까지 기웃거리게 될지 모르겠다. 벌써 물고기나 나비로 변신 중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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