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들의 경주, 그곳에 가고 싶다]<3> 경주의 가을

사라진 천년 제국의 단풍들 천변만화 모습으로 반겼다

보문정에 가을이 왔다. 보문호숫길을 달리다 브레이크를 밟았다. 단풍 사이로 황룡원의 9층목탑이 엿보인다.
보문정에 가을이 왔다. 보문호숫길을 달리다 브레이크를 밟았다. 단풍 사이로 황룡원의 9층목탑이 엿보인다.

경주에 가을이 왔다.

가을에도 격조가 있다. 경주의 가을은 '천년의 가을'이다. 설악산이나 백양사단풍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천년의 세월이 만들어내는 애절함과 쓸쓸함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한 두 해만에 빚어내는 가을이 아니라 세월이 켜켜이 쌓이고 묵은 오래된 가을의 전설이다.

벚꽃 휘날리는 경주의 봄에 생동감 넘치게 탄성을 질렀다면 도시 분위기마저 가을색으로 바뀐 '경주의 가을'에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우리들의 경주는 언제 가더라도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모습으로 반겨준다. 경주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단풍으로 물든 불국사는 마치 현세에 구현된 부처의 땅, '불국토'(佛國土)를 떠올리게 한다.

고분의 도시라는 것을 새삼 각인시키는 대릉원과 노서·노동리의 고분분은 어느 새 갈색으로 갈아입었다. '고분'은 우리에게 죽은 왕의 공간이 아니라 천년을 넘어 삶이 이어지면서 영속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생명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황남대총과 천마총이 반겨주는 대릉원도 가을색이 한창이다. 인생샷 핫스팟에 자리 잡은 목련도 가을을 탄다. 바람이 불면 휘날리던 봄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봉분사이로 뚝뚝 낙옆이 떨어지는 풍경은 가을 경주의 선물이다. 달이 차 보름달이 달빛을 휘몰아치는 그런 가을밤은 아니지만 경주의 가을밤에서는 아주 고도(古都)의 냄새가 물씬 묻어나서 더 좋다.

◆천년의 가을 경주

그래서 가을엔 경주에 가야 한다. 단풍색이 고운 경주가 아니라 천년의 가을을 만나러 경주에 가야 한다.

천년제국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이후 천이백여 년이 흘렀다. 해마다 가을이 찾아오지만 경주의 가을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비장한 아름다움이 따라와서 좋다. 가을바람에는 천년의 '희노애락'이 묻어나고 왕들의 역사가 숨어있고 그 시대를 살아낸 백성들의 낮은 목소리가 담겨져있다. 그 해 그 가을끝자락에서 신라가 역사에서 사라졌더라도 그 시대를 살아가던 백성들의 가을은 어김없이 돌아왔을 것이다.

황룡사 빈터에 제멋대로 피어난 코스모스도 이젠 다 졌다. 천년동안 버려진 빈터에 야생화가 자라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황룡사 빈터에 제멋대로 피어난 코스모스도 이젠 다 졌다. 천년동안 버려진 빈터에 야생화가 자라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신라의 백성은 고려의 백성이 되었더라도 경주의 가을은 변함없이 그들의 일상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채 느끼기도 전에 초겨울로 넘어갈 정도로 짧은 가을이다. 천년의 숨결도 애잔한 아름다움으로 가볍게 담아내는 것이 가을경주다. 천년이 지났다고 천년의 슬픔이 사라지는 법은 없다.

경주의 가을은 그래서 온전히 경주의 역사 속으로 스며드는 여행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가을 경주는 폐허에서 맞닥뜨린 여행이다. 가을은 이제 시작됐다. 신라 최대의 왕사(王寺) 황룡사가 있던 자리는 텅빈 폐허다. 그 빈 땅에 제멋대로 피어있던 코스모스와 야생화는 어느 새 다 졌고 그사이 자라다 만 풀들이 듬성듬성하다. 땅이 비어있으니 풀이며 꽃들이 제멋대로 피어날 수 있었으리라. 버려진 폐허에 무엇인들 자라지 못하겠는가. 거대한 목탑과 금당도 거센 불길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경주에는 신라의 궁궐이 없다. 경복궁과 덕수궁, 창덕궁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서울과 달리 천년제국의 영화를 과시할 궁궐은 불타 버렸다. '그 역사 복원해서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여기던 신라역사에 대한 우리 시대의 오해가 더 큰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몸속을 흐르는 애잔함의 바탕은 경주이자 신라라고 생각한다. 사라진 월성과 황룡사, 혹은 수많은 폐사지를 만날 때마다 아련하게 눈에 떠오르는 안타까운 풍경이 적지 않다.

'포석정'에 가면 천년제국 최후의 풍경이 선하게 그려진다. 견훤의 후백제군이 경주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는데도 왕과 비빈 그리고 신하들은 포석정에서 성대한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연회였든 구국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회였든 간에 그날 신라는 도륙당했고 제국의 위엄은 무너졌다.

927년 늦가을인 11월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찬바람이 몰아치던 남산자락 포석정에서 풍전등화 처지의 왕이 한가하게 연회를 열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날 견훤의 군사들은 경주를 점령해서 능욕했고 경애왕은 자진(自盡)을 당했다. 신라는 그날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포석정은 그런 신라의 마지막날의 치욕을 목격한 비장한 슬픔을 담고 있다.

첨성대 해바라기밭. 해바라기는 전장위에 핀 꽃이던가? 국적불명 핑크뮬리보다는 해바라기가 애잔했다.
첨성대 해바라기밭. 해바라기는 전장위에 핀 꽃이던가? 국적불명 핑크뮬리보다는 해바라기가 애잔했다.

◆천년의 슬픔

불국정토의 유통기한은 천년이었던 모양이다. 이 땅에 부처의 세상을 구현하려는 신라인의 노력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하고 남산을 부처의 뜻을 전하는 도량으로 꾸몄다. 아마도 부처의 뜻은 윤회가 아니었을까. 해마다 가을이 찾아와 곱디고운 가을색으로 치장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불국사 단풍은 절정으로 치닫는 중이다. 청운교, 백운교를 배경으로 한 단풍은 붉게 물들고 있고 석가탑과 다보탑을 거느린 대웅전 주변을 수놓은 국화도 가을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핑크뮬리'와 묘하게 어우러진 첨성대는 '사진맛집'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핑크뮬리 한 켠에선 해바라기가 한창이다. 첨성대가 지켜본 것은 하늘과 우주만은 아닐 것이다.

첨성대의 해바라기는 고전영화 <해바라기>를 떠올리게 한다. '눈이 아름다운' 소피아 로렌이 주연한 <해바라기(Sun flower)>는 전쟁 속에 핀 사랑과 이별 그리고 엇갈린 운명을 표현했다. 남편의 전사통보를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 찾아 나선 소피아 로렌이 맞이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해바라기밭'이었다.

사람 키 높이로 자란 해바라기 밭은 전장에서 스러진 병사들의 무덤이었다. 첨성대 역시 신라의 마지막 날 견훤의 후백제군과 맞서 싸운 전장이자 신라군의 무덤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바라기는 전장(戰場)위에 핀 비정한 꽃인 모양이다. '해바라기는 해를 보며 핀다.'

기세등등한 적의 말발굽 소리에 경주는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천년제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궁궐은 불타고 도성은 약탈의 대상이었다. 천년을 이어왔고 새 천년을 준비하던 제국은 그렇게 사라졌다. 천년동안이나 계절의 변화에 무심하던 가을이었다. 가을은 제국도 사라지는 계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했다. 경주의 가을이 애상(哀想)에 젖은 것은 그것 때문이다.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의 숲길. 1일부터 경북천년숲정원이 개방됐다.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의 숲길. 1일부터 경북천년숲정원이 개방됐다.

◆ 경주의 가을 맛집

경주는 단풍도 곱다. 불국사 단풍은 아예 전국 사찰 단풍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가는 숲길에 단풍이 들면 장관이다. 11월 중순이면 절정에 들 것 같다.

첨성대 핑크뮬리와 해바라기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스러지기 직전이다. 주말에는 대릉원을 찾는 인파들이 몰려 교통혼잡도가 절정이다. 첨성대와 월성, 계림을 두루 산책하다가 월정교까지 가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인생샷에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

불국사 가는 길의 '통일전' 앞길은 오래 전부터 은행나무길로 유명하다. 은행잎이 떨어지지 않은 지금 한창이다. 은행나무숲 명소로는 영천으로 가는 방향의 서면 '도리마을'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가로수로 만나는 은행나무와 달리 쭉쭉 뻗은 은행나무숲이 장관이지만 아직 제 색을 내지 못한 상태다.

도리마을 은행나무 숲
도리마을 은행나무 숲

경주의 단풍은 대략 다음 주나 돼야 절정에 다다를 것 같다.

차를 타고 가다가 멈추고 싶은 단풍길이 있다면 단연 보문호숫길이다. 특히 보문단지 경주월드나 황룡원 부근의 가로수들을 바라보다가 '앗 저기다' 하고 급브레이크를 밟게 되는 곳이 '보문정'이다.

은행나무가 빚어내는 가을빛 풍경으로는 강동면 운곡서원도 사진맛집이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가을풍경은 온갖 나무들이 산재한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일 것이다. 3년여의 공사 끝에 '경북 천년숲 공원'이 1일부터 개방됨에 따라 경주 최고의 가을명소로 등극할 것으로 예상된다. 죽죽 뻗은 메타스퀘이어 숲에 서면 누구나 모델이 될 정도로 아름답다.

황성공원은 경주시민들의 산책로지만 가을에는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황성공원은 경주시민들의 산책로지만 가을에는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내 황성공원은 경주시민들의 산책로지만 가을에는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릉원과 시내 고분군등 군집을 이룬 왕의 무덤 대신 나홀로 자리 잡은 진평왕릉과 원성왕릉, 경덕왕릉, 선덕여왕릉, 진덕여왕릉 등을 찾아보는 것도 가을경주를 즐기는 색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 담장을 치고 관리를 하면서 관람료를 받는 고분에 비해 버려두고 방치한 듯한 고분들이어선지 애잔한 느낌이 든다.

신라왕들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한 진평왕의 능이 자리 잡은 보문들판을 가로지르면 황복사 삼층석탑이 홀로 서있는 풍경과 만난다. 경주시내에서 가장 너른 들판인 이곳 역시 천년의 영화와 치욕을 함께 치러낸 땅이다.

경주의 가을은 이제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천년의 가을에 우리들의 가을 기억이 더 쌓이고 있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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