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판 위에서 중년의 두 장사가 마주 보며 샅바를 바투 잡는다. 호각이 울리자 몸과 몸이 부딪힌다. 얼핏 정적인 것처럼 보이나, 짧은 순간 힘이 뒤엉키고 기술들이 교차한다. 한 장사가 왼발을 모래판에 꽂아 지탱하더니 그대로 상대를 돌려 넘겼다. 등이 바닥에 닿자 모래가 비산한다.
이윽고 웃음 섞인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역시 형님한테는 안 되네요." 가만 보니 두 장사의 얼굴이 닮았다. 이들은 지역에서 수십년간 씨름판의 낭만을 지켜온 형제 장호진(58) 씨와 장혁수(50) 씨다.
경북 경산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 형제가 모래판에 발을 들인 것도 30년이 넘었다.
호진 씨는 군대 제대 후 씨름 선수를 하던 친구들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입문했다. 이후 빠르게 씨름과 사랑에 빠진 그는 당시 중학생이던 동생에게도 씨름을 알려줬다. 어릴 때부터 "형님과 함께 있는 게 좋았다"던 동생은 두말없이 배우던 유도를 관두고 씨름을 시작했다.
타고난 체격이 건장한 호진 씨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마추어 씨름판의 강자가 됐다. 1996년 전국대회 청년부 우승을 시작으로 최근까지도 무수히 많은 대회의 정상에 올랐다. 동생 혁수 씨도 전국 대회에 나가면 3위 안에 곧잘 드는 실력자다.
호진 씨는 "대회 우승 경력만 보면 생활체육 선수로서 이룰 건 다 이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여전히 씨름을 잘 모르고, 배울 게 더 많다는 생각이다"라며 "언제까지 씨름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10년 이상은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며 웃었다.
경산시씨름협회에서 각각 전무와 이사직을 맡은 호진 씨와 혁수 씨는 지역민들에게 씨름의 매력을 알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 이들을 매년 4월 경산시체육회 후원으로 대구대 실내 씨름장에서 씨름 교실을 열고 지역 동호인들을 가르친다.
누구나, 어디서든 즐길 수 있다는 게 씨름의 매력이지만 정작 모래판 위에서 제대로 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형제는 동호인들이 씨름에 재미를 붙일 방법을 늘 고민했다고 한다. 결론은 '하루 논다는 생각'으로 씨름장에 오게 만드는 것이다.
혁수 씨는 "씨름에 관심을 가지고 온 사람이 승패에 초점을 맞춘다면 금방 흥미를 잃을 수 있다"며 "우리는 승부를 떠나 생활체육으로서의 씨름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기술도 중요하지만, 씨름의 매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같은 씨름인끼리는 어떻게 소통하는 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수십년의 세월 동안 느껴온 씨름의 매력은 명확하다. 바로 몸과 몸을 맞대면서 싹트는 유대감이다.
이에 관해 혁수 씨는 "씨름이란 게 묘하다. 같이 모래판 위를 뒹굴면 어색한 사이도 금방 가까워진다"며 "그래서 이겨도, 져도 재밌다. 이런 인간미가 씨름이 엘리트 체육보다 생활체육에 적합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두 형제는 씨름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왕도가 없다"고 답한다. 기초를 착실히 배우되 자기 몸에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호진 씨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우선 내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내 움직임에 대해 계속 생각해야 한다"며 "나도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배움을 청할 때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씨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타고난 덩치도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다. 아마추어 수준에선 마른 사람도 충분히 재밌게 즐길 수 있다"며 "체력과 지구력 그리고 정신력을 키우기에 이만한 운동이 없다"고 강조했다.
형제는 긴 암흑기를 지나고 있는 씨름을 다시 대중들 곁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란다. 동호인들을 손수 가르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호진 씨는 "생활체육인들 많아야 엘리트 씨름에 대한 관심도 늘고 선수들도 흥이 난다. 당연한 이치"라며 "결국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씨름이 재밌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리는 게 우리 형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비인기종목이 돼버린 씨름이 다시 도약하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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