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하고 싶다? 이른바 '인생 리셋' 판타지는 젊은 세대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집안 돌보는 일을 수십 년 간 해왔지만 그걸 일로 봐주지도 않는 전업주부들도 인생 리셋을 꿈꾼다. JTBC 토일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바로 그 판타지를 건드리는 드라마다.
◆전업주부들의 인생 리셋 판타지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르게 새 삶을 시작하고픈 이른바 '인생 리셋'에 대한 욕망은 최근 우리 사회에 그 어느 때보다 깊게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욕망들이 투영된 대표적인 사례는 최근 젊은 세대들이 웹툰, 웹소설을 통해 열광하는 이른바 '회귀물' 열풍이다. 주인공이 어떤 위기상황에서 과거로 회귀해 다시 삶을 리셋해 살아가는 서사 장르인 '회귀물'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판타지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미 한 번 살아본 경험을 통해 현실적으로는 이룰 수 없는 막대한 부를 얻기도 하고,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사이다 복수를 실현시키기도 한다.
회귀물 원작을 가진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이 이러한 판타지를 통해 최고 시청률 26.9%(닐슨 코리아)라는 엄청난 성과를 내서일까. 새로 시작한 JTBC 금토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재벌집 막내아들'이 가진 회귀물의 느낌이 묻어난다. 4회 만에 11.2%(닐슨 코리아) 두자릿 수 시청률을 낸 이 드라마는 차정숙(엄정화)라는 20년차 전업주부의 인생 리셋 판타지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차정숙은 의사 남편에 의사 아들 그리고 공부 잘 하는 딸을 둔 전업주부다. 그 역시 의대 출신이고 성적도 좋아 의사를 꿈꿨지만 덜컥 지금의 남편 서인호(김병철)와의 하룻밤에 아이를 갖게 되고 결혼을 하면서 그 꿈을 접었지만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고 믿었다. 아니 입만 열면 무시하는 말들을 쏟아내고 아내이자 엄마의 집안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족들 속에서 그것이 괜찮은 삶이라 착각하며 무뎌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무뎌진 삶에 긴장감을 주는 일이 벌어진다. 간 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는 통보를 받은 것. 그러자 이 가족의 실상과 그 안에서의 자신의 처지가 드러난다. 남편이라고 믿었지만 수술 앞에 갈등하고, 애써 결심하려던 차에 시어머니가 나서 이를 반대한다. 마침 간 공여자가 생겨 수술을 하고 가까스로 살게 되지만 차정숙은 각성한다. 내 삶을 다시 살아보겠다고.
20년 동안이나 전업주부로 있으면서 장롱면허가 되어버린 의사 면허를 다시 꺼내 레지던트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 먼저 그간 전업주부라며 강요됐던 일들을 치워버리고, 못했던 것들을 저질러 버린다. 시어머니가 쓰던 명품들만 물려받았던 그는 백화점에서 남편 카드로 명품을 사고, 친구와 우아하게 브런치를 즐긴다. 아침이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식사도 알아서 챙겨먹으라 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 차정숙은 그렇게 병원 레지던트로 들어간다. 회귀물처럼 젊은 나이로 되돌아가는 그런 판타지는 아니지만, 나이 마흔 여섯에 레지던트를 시작한다는 판타지가 시작된다. 물론 쉽지만은 않은 길이지만, 그간 걸어왔던 전업주부의 삶과는 다른 자신의 삶을 다시 쓴다는 의미에서 그 길은 인생 리셋 판타지를 담은 회귀물의 서사를 닮았다.

◆적잖게 나타난 허점들
하지만 '닥터 차정숙'은 개연성이나 디테일에 있어서 적지 않은 허점을 가진 드라마다. 가장 큰 허점은 차정숙이라는 각성한 여성이 보여주는 서사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그 구도는 너무나 익숙한 사각멜로 구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차정숙이 서인호와 결혼하게 된 건 의대 시절 덜컥 하룻밤에 아이를 갖게 되면서다. 본래 서인호의 연인은 최승희(명세빈)였다. 그러니 서인호의 실수(?) 혹은 외도로 그 관계가 엇나간 것이었지만, 서인호는 차정숙과 결혼한 후에도 최승희와 불륜관계를 이어왔다. 드라마 상에서 보면 최승희는 병원에서 꽤 잘나가는 의사인데 이러한 전문직을 가진 여성이 서인호와 불륜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는 게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물론 최승희가 가진 딸이 어딘가 서인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커리어우먼의 당당함이 엿보이는 최승희가 이런 관계에 얽매어있다는 게 애매한 지점은 있다. 결국 서인호라는 어찌 보면 겉보기엔 좋아보여도 그다지 매력이 없어 보이는 남자에게 차정숙과 최승희가 얽혀 있다는 구도가 나오는데 이것 역시 그다지 개연성 있게 느껴지진 않는다.
또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남편 서인호에게 일종의 복수를 하는 서사 속에 들어와 있는 로이킴(민우혁)이라는 인물도 마찬가지다. 물론 로이킴이 차정숙의 간 이식 수술을 해준 주치의라는 설정이 되어 있지만, 그 후 같은 병원에서 일하게 되고 차정숙과 유사 멜로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왜 로이킴 같이 잘 나가는 솔로가 이런 선택을 하는 지에 대한 설득력이 별로 없다. 즉 이러한 사각멜로 구도는 차정숙의 인생 리셋과 더불어 불륜까지 저지른 남편에 대한 일격을 위해 의도적으로 마련된 틀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틀 안에 캐릭터들이 의도적으로 들어와 있어 개연성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또한 차정숙이 홀로 서기를 해나가는 여성 서사를 그려내야 할 드라마가, 결국은 멜로 구도의 틀에 자꾸 갇히게 되는 것도 그리 좋은 선택이라 보기 어렵다. 스스로 서야 할 능동적인 캐릭터가 로이킴 같은 남성의 도움을 받는다거나 하는 것이 이 여성 캐릭터의 매력을 꺾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빠져드는 이유
그렇다면 이러한 허점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에 빠져 드는 건 왜일까. 첫 번째는 차정숙이라는 전업주부 캐릭터가 주는 공감대다. 20년을 전업주부로 자신을 희생하며 일해 왔지만 그 일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가족들의 모습이 그렇다. 20년을 일한 그에게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 집의 공동명의조차 허락하지 않고, 남편 카드로만 살다 보니 제 이름으로 된 카드 한 장 없는 처지가 됐다. 매일 같이 아침이면 밥상을 차리고 아이들의 등교 준비, 남편의 출근 준비를 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지만 그건 그만한 가치를 인정받는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됐다. 가사와 육아 노동 같은 것들을 마치 공짜처럼 치부하며 헌신적인 삶을 요구받는 전업주부들은 한 때 꿈이 있었지만 이제는 돌아가려 해도 받아주는 데가 없다. 이른바 '경단녀'가 돼 면접에서 "그간 쭉 노셨군요?"라는 말도 안 되는 말로 수모를 겪는 게 이들의 처지가 아닌가.
그러니 차정숙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공감대가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공감대 위에서 그가 펼쳐나가는 '인생 리셋' 과정들을 시청자들은 '하고 싶은 거 다해'라고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떡 하니 병원에 재취업하고 레지던트 과정을 겪으면서도 로이킴 같은 판타지적 남성을 만나게 된다. 물론 반대급부로서 차정숙의 남편 서인호와 불륜으로 얽혀있는 최승희 역시 차정숙에게 결국은 돌아올 사이다로서 빌런의 역할로만 세워진다. 마치 서인호-최승희의 불륜과, 차정숙-로이킴의 썸이 대결구도처럼 그려지면서 일에 있어서도 또 사랑에 있어서도 차정숙이 승리하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판타지가 그려진다.
이처럼 차정숙이라는 캐릭터의 매력과 호감이 중요한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엄정화라는 배우의 매력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발랄함과 일과 사랑을 찾아가는 진지함을 모두 그려내는데 있어 이 배우가 가진 호감은 이 작품에 중요한 힘을 발휘한다. 허점들이 가득하지만 그걸 무화시키며 한바탕 기분 좋은 판타지 속으로 시청자들을 빠져들게 하는 가이드 역할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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