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들의 경주, 그곳에 가고 싶다]<16> 아비지의 꿈, 9층 목탑의 전설

불탄 욕망의 잿더미 위…봄마다 야생화는 피고 지고

야생화가 핀 황룡사지
야생화가 핀 황룡사지

'아비지'(阿非知)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높은 탑을 쌓더라도, 아무리 웅장한 건물을 짓더라도 인간의 욕망은 하룻밤에 사라질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신라의 대가람 황룡사에 세운 선덕여왕의 9층 목탑도, 백제 무왕의 꿈이 담긴 미륵사 9층 석탑도 그저 한 순간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탑이 부처일리가 없고 탑을 만든다고 부처의 욕망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일연(一然) 스님은 한 순간에 불에 타 잿더미가 된 황룡사터 9층 목탑이 있던 자리에 섰다. 1238년 가을이었다. 그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목탁만 두드려댔다. 황룡사와 9층 목탑은 몽골군의 방화로 일주일 내내 불에 탔고 시가지는 잿더미를 뒤집어썼다.

◆몽골군 침략으로 황룡사 목탑 소실

온 나라가 몽골군의 기병에 유린당했지만 고려조정은 '팔만대장경' 을 완성하면 불법으로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여기면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잿더미 앞에 선 일연은 화염에 휩싸인 황룡사 9층 목탑이 눈에 선했을 것이다. 3차 고려정벌에 나선 몽골군은 죽주성에서 고려군의 기습으로 패배하는 등 자존심에 상처를 입자 곧바로 남하, 대대적인 약탈과 유린에 나섰다. 강화도에 들어가 항전하고 있던 고려왕의 항복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우뚝 솟은 황룡사 9층 목탑은 몽골군의 표적이었다.'바벨탑'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있던 거대한 9층 목탑은 몽골군의 비위를 거슬렀다.

'탑은 허공이니라. 모든 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아비지의 예견은 단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통일신라 때 두 차례, 고려왕조에서 세 차례 벼락을 맞았다. 그 때마다 보수와 중수를 거듭하면서 장대한 위용을 자랑하던 9층 목탑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벼락에 맞았을 때는 보수할 수 있었지만 뼈대조차 남지 않고 잿더미가 된 목탑은 더 이상 재건되지 못했다.

643년 백제 장인(匠人) 아비지를 초빙, 3년여 만에 완공된 9층 목탑은 600여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의 병난이 있는 이래 금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고려사 권 24>

아비지는 백제의 멸망을 예견하듯이 목탑도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벼락을 맞아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면 신라가 멸망하듯이 목탑의 운명도 그리 될 것이라는 것을. 백제 무왕의 꿈이 익산 미륵사에서 사라졌듯이, 신라의 꿈도 인간의 욕망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러기에 그는 9층 목탑을 지어놓고 성대한 준공식을 치르기도 전에 바람처럼 사라진 것이리라.

◆백제인 아비지,황룡사 목탑 건립

폐허와도 같은 빈 땅이다. 군데군데 주춧돌과 유적 발굴 표지판이 듬성듬성 눈앞에 보였다. 분황사 앞 빈터에는 청보리가 듬성듬성 올라와 있다. 아마도 군위 인각사에 머물던 일연 스님이 폐허가 된 황룡사에 오지 않았더라면 삼국유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여졌을 지도 모른다. 삼국유사는 황룡사와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지 않았다. 몽골군의 고려정벌이 9차례 이어지면서 그때까지 남아있던 웬만한 목조 건축물들은 불에 탔다.

누각형식의 9층 목탑이 있던 자리는 20톤에 이르는 거대한 심초석과 주춧돌이 도드라져 보였다. 잿더미가 된 그 폐허에서도 봄마다 꽃을 민들레와 고들빼기 등 야생화는 피었을 것이다. 일연 스님의 심경도 그랬을까. 출가한 신분이었지만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목탑 앞에 그는 평정심을 유지히기 어려웠으리라.

황룡사지 터에 세워진 아비지 기념비
황룡사지 터에 세워진 아비지 기념비

그 목탑지 바로 아래 비석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아비지 기념비'였다. 1987년 경주시가 황룡사 9층 목탑의 주역, 아비지를 기리는 기념비를 조성한 것이다. 백제와 전쟁중이던 신라가 백제 무왕의 꿈이자 숙원인 익산 미륵사 석탑과 목탑을 건립한 아비지를 초빙, 미륵사보다 더 큰 규모의 9층 목탑을 건립하도록 한 것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여왕이 즉위한 신라는 주변 어느 나라 역사에서 존재한 적이 없는 '여왕의 시대'를 열었지만, 백제에 100여개 성을 빼앗기는 등 조롱의 대상이었다. 일연 스님은 선덕여왕이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한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선덕여왕 즉위 5년인 636년 중국에 유학간 자장법사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 감화되어 불법을 전수받았다.

그때 신령한 사람이 나타나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거라.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치며 왕 없이도 영원히 편안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자장이 귀국해서 선덕여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권하였고 선덕여왕이 탑을 세우라고 하자 신하들이 '백제에 부탁해 공장(工匠)을 데려와야 가능합니다.'라고 고하였다. 선덕여왕이 사신을 보내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서 정중하게 공장을 청하자 같은 불국(佛國)인 백제왕이 흔쾌히 백제 최고의 장인 '아비지'와 목수들을 보냈다."

◆선덕여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선덕여왕 즉위 초기 창건한 분황사에도 탑이 있다.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인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이 탑은 벽돌을 쌓아올린 중국식 전탑형태다. 그 때까지 신라의 탑 건축술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탑이다.

그랬던 신라가 그로부터 10년 후,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미터, 바닥면적만 490㎡에 높이 225척(80미터)에 이르는, 20층 건물에 버금가는 누각을 갖춘 목탑을 완성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상상할 수 없는 높이와 규모의 목탑을 건축한 것은 '아비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보문단지 있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재현한 황룡원
보문단지 있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재현한 황룡원

익산 미륵사에서 쌍 석탑과 9층 목탑을 건립한 아비지의 명성은 신라 땅에까지 자자했다.선덕여왕의 백제 장인 초빙에 백제가 응한 것도 미스터리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선덕여왕의 9층 목탑건립이 여왕의 권위를 과시하기위한 것이라는 것을 백제가 모를 리가 없었을텐데 말이다.

9층의 목탑은 1층 일본을 위시해서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 등 신라 주변 아홉 개 나라에 위엄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함의가 담겨있다는 것이 처음부터 알려졌다면 백제가 장인을 보냈을 리 만무하다. 삼국유사는 아비지가 탑의 기둥(찰주)를 세우던 날, 백제가 망하는 꿈을 꿨고 그래서 한동안 공사가 중단됐다는 사실을 지나치지 않았다.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고 캄캄해지는 가운데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더니 모두 없어지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공장(工匠)은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백제인인 아비지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미륵사지 목탑을 능가하는 규모가 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한 때 불가에 귀의하기도 한 그는 물 흐르는 대로 불법에 따랐다. 대중이 탑을 도는 것이나 왕이 탑을 세우는 것이나 욕망은 매한가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왕의 권위는 부처가 높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아무리 장대한 탑이라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비지는 첨성대 건립도 주관했다. 선덕여왕은 부처의 현신(現身)이자 신의 대리인으로 '천문'(天文)을 다스리는 지혜로운 여왕의 모습도 갖추고 싶어했다.

선덕여왕의 시대는 비록 '비담의 난'으로 갑작스럽게 마쳤지만 여왕의 시대는 '삼한통일'의 꿈을 본격 추진하는 초석이자 계기로 작용했다. 탑은 석가모니(부처)가 열반에 든 뒤 그 사리를 담은 기념조형물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인도의 불교도들은 석가모니를 기리고자 석가모니의 사리를 담은 탑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현세의 불국토라 칭하던 신라 땅에는 통일신라말기까지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었고 그 사찰마다 고유한 양식의 탑들이 들어섰다. 아비지의 건축술을 전수받은 신라는 이후 최고의 탑을 남일 수 있었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신라 탑의 전형이자 전설이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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