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이름은 많다. 환자들을 대할 때는 의사이고 학생들에게는 교수로 기억될 것이지만 누군가의 딸이고 내 아들에게는 엄마이다.
고3이 된 아들에게 못다한 뒷바라지를 해보겠다고 개원 전 일찌감치 사표를 썼다. 시간 여유가 있다 보니 아들 혼자 했었던 등교에 포옹으로 응원 인사를 하기도 하고 학원 중간에 사 먹어야 했던 저녁식사를 집에서 준비해서 먹이기도 하고 하교할 때 학교 앞에서 아들을 기다려 보기도 한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일을 안한 적이 없어 이런 여유로운 일상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재미있기도 하고 그동안 몰랐던 걸 깨닫게 되기도 한다.
오늘도 아들을 마중하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체육 수행평가를 하다가 터졌다며 아들이 소파 위에 던져놓은 교복 바지가 보인다. 좀 심하게 터져서 수선을 맡길까 고민하다가 내가 한번 해보기로 하고 바지를 꿰매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왜 그동안 아무것도 몰랐을까'
더러워진 아들의 침대 시트를 갈면서, 찾아 헤매던 리모컨 배터리 뚜껑을 수납장 아래에서 찾아 다시 끼우면서, 아침 준비를 하다가 얼굴에 튄 기름 때문에 연고를 바르면서 다시 한번 드는 생각. 난 그동안 아무것도 몰랐구나.
학생 시절부터 별나게 공부를 한 건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자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은 늘 늦은 저녁이었고, 의대생이 되고 나선 거의 자정이 돼서야 귀가하곤 했다. 인턴, 레지던트가 되고 나서는 말 할 것도 없고.
그동안 난 내 침대 시트가 늘 깨끗한 것도, 잃어버린 줄 알았던 머리핀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도, 튿어진 옷이 수선되어 옷장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던 것도, 그 어느 것 하나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어머니도 나처럼 요리를 하다 수없이 손을 베이고 다쳤을 건데.. 나에겐 없는 기억이다.
하지만 침대 시트가 늘 깨끗할 수 없고, 잃어버렸던 머리핀이 발이 달려서 혼자 책상 위로 올라갔을 리도 만무하며, 튿어진 옷이 저절로 고쳐지는 건 불가능하다. 나의 어머니 또한 요리를 하면서 한 번도 다치지 않았을 리 없다. 그건 이런 일들을 나 모르게, 아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아무 얘기 없이 해 놓았기 때문에 나는 이런 데 대한 인지 없이 당연한 안락함을 누렸을 거다.
엄마 손수민을 얘기하다 보니 딸 손수민이 생각의 끝을 잡고 따라나온다.
내 할 일은 내가 알아 하고 부모님께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컸다고 생각했던 딸 손수민의 비어있는 시간에 엄마는 침대 시트를 갈고, 머리핀을 주워 책상에 올려놓고 튿어진 옷을 고쳐 옷장 안에 넣어두었으며 데인 자국에 연고를 발랐을 것이다.
나 혼자 집안 청소를 하다가 문득 올려다 본 대낮의 햇살 아래, 식구들이 출근하고 나간 집에서 혼자 집안일을 하는 젊은 내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의사 손수민 교수 손수민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준 내 부모님에게, 그리고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나 혼자 소심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손수민재활의학과 손수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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