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재난 속 아파트에서 펼쳐지는 생존 전쟁…리뷰 ‘콘크리트 유토피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는 재난을 그린 영화이다. 그렇다고 재난 속 인간승리나 불굴의 용기, 가족애 같은 통속성을 그리지 않기에 재난영화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국형 우화를 재난에 녹여 넣은 사회성 짙은 풍자영화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어느 겨울, 대지진이 서울을 집어삼킨다. 모든 건물이 무너진 가운데, 오직 황궁 아파트만 멀쩡하게 서 있다. 전기와 통신, 수도가 끊기면서 외부인들이 추위를 피해 이 아파트로 몰려든다. 아파트 주민들은 대표를 선임하고, 외부인들을 몰아낸다. 그리고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니다. 부의 척도이며, 한 개인의 성실도와 배경, 미래성을 모두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래서 '아파트 사회학'이라는 말도 있다.

영화는 이런 상징성을 오프닝으로 강렬하게 보여준다. 1970, 80년대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변화되는 한국의 모습을 기록 영상으로 훑어낸다. 그리고 아파트로 가득 채운 도심 끝에서 땅이 파도친다. 그리고 모두 무너지고, 홀로 살아남은 황궁아파트를 웅장하게 보여준다. 깔끔한 오프닝이다.

재난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건 필요하지도 않다. 재난 이후 살아남은 이들의 생존 전쟁이 주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첫 전투가 내부와 외부를 차단하는 일이다. "아파트는 입주민의 것이다."라는 구호 아래 외부인들을 쫓아낸다. 그들은 바퀴벌레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이런 일을 "방역"이라고 부른다. 내부인들 속에서도 '자가'와 '전세'를 나누면서 세분화한다.

이런 구분은 위험에 처한 모든 조직의 공통된, 그리고 원초적인 대응방법이다. 이 속에서 갈등의 조짐들이 생긴다. 생존만이 중요한 것인가, 그 절박함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영화는 세 명의 캐릭터가 끌어간다. 강력한 지도력으로 황궁아파트를 지키는 주민 대표 영탁(이병헌), 다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의 명화(박보영), 둘 사이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민성(박서준)이다. 그리고 세속에 흔들리는 부녀회장 금애(김선영)가 이들 사이를 연결시킨다.

영탁은 초반 어수룩한 이미지에서 점차 압도하는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성장한다. 그는 호소력 있는 말로 주민들을 통솔하는 리더가 된다. 생존을 위해 폭력도 불사한다. 그리고 주민 잔치에서 노래를 부른다. '539번' 윤수일의 '아파트'. 1982년 대한민국에서 아파트 열풍이 불 때 발표된 곡이다. '오늘도 바보처럼 미련 때문에/ 다시 또 찾아왔지만/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영화 속 영탁의 서사를 떠올리면 여간 슬픈 곡이 아니다.

영화는 억지 휴머니즘이나, 신파를 끼워 넣지 않는다. 선악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잔혹하며 씁쓸하고, 안타깝고 무력한 느낌을 던져 준다. 영화 내내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래서 명화의 선택이나 민성의 어정쩡한 스탠스는 고구마를 통째 먹은 듯 답답하다.

황궁 아파트라는 이 방주는 과연 유토피아인가. 그러나 그들만의 유토피아는 광기 어린 디스토피아로 치닫는다.

영화는 '아파트'라는 공감 100배 공간을 통해 긴장감 있게 극을 끌어간다. 생존과 인간성이라는 두 가지 가치 또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장의 에피소드만으로도 극적 재미를 선사한다. "그래도 아파트 한 채 건사한 것만 해도 어디예요?" 지구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한 평범한 소시민들의 희망메시지. 쓰디쓴 웃음을 자아낸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영화는 이병헌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한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안정적인 발성에 애련함이 묻어나는 표정에 돌변하는 눈빛, '아파트'를 부를 때 왼쪽 다리 흔드는 것 까지 미친 듯한 연기를 보여준다. 소위 말하는 '어너더 레벨'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디스토피아 서울의 비주얼이나, 공감되는 스토리, 한국 사회를 꼬집는 풍자, 배우들의 호연, 거기에 잘 어울리는 음악까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영화는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인 '유쾌한 이웃'을 원작으로 한다. 엄태화 감독은 '잉투기'(2012)로 데뷔해 강동원 주연의 '가려진 시간'(2016)을 연출했다. 배우 엄태구의 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 '아니다'(ou)와 '장소'(topos)의 합성어로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을 뜻한다. 그래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관념상의 장소인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콘크리트로 채워진 아파트를 향한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이상향을 잘 비유하는 제목이고, 영화 속에서도 잘 그려낸다. 129분. 15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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