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다섯째 딸 정순이와 여섯째 딸 정옥이가 글을 통해 인사 올립니다.
아버지가 떠나가신지도 벌써 65년이 됐습니다. 돌아가실 때쯤 학생이었던 저희 둘은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를 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복이고 아버지 덕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업적을 살펴볼 때마다 항상 아버지를 우러러보게 됩니다. 젊어서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갖은 고초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셨고 해방 이후에는 목사와 교육자로써 크게 활동하셨지요. 1919년에는 안동 예안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셔서 일제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지요.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아버지의 모습은 조국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날 선 눈빛을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한학에 능하던 젊은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그 때 석주 이상룡 선생으로부터 기독교를 접하시고 목회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 때도 아버지는 조국과 하나님을 위한 한 길만 생각하셨습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신 탓에 일제에 의해 목회자 자리를 내놓으셔야 했고 결국 우리 가족은 산 속에 들어가 소나무 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일제 교육을 거부한 대신 집에서 자식들을 다 가르치셨지요.
그럼에도 아버지에 대한 일제의 핍박은 계속됐습니다. 일본 순사들이 아버지를 체포해 가던 때, 자식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을 때 모진 고문에 시달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혼절하시기도 했지요.
어린 시절 많은 고생이 있었지만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가족에게는 늘 자상하셨고, 항상 바른 길만 가는 아버지를 존경할 뿐입니다. 항상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에 자식들이 '일본놈'이라고 하면 아버지는 "함부로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며 "'일본사람'이라고 하거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게 아버지는 사람을 함부로 미워하면 안되는 것임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해방 전까지 아버지는 옥고를 치르고 계셨습니다. 해방 후 아버지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석방됐을 때는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돼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사람들로부터 '산 순교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존경을 받았고 그간의 독립운동에 대한 업적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었습니다.
1954년, 아버지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추대되시고 일제가 강요했던 신사참배에 대한 결의 취소 성명을 주도하셨을 때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끝내 신사참배를 거부하신 아버지의 올곧음을 사람들이 알아준 것이고, 아버지의 당당함이 결국 많은 목회자들의 존경을 이끌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원영 목사님 아니면 신사참배 결의 취소 성명을 말할 사람이 없다"고 했던 많은 목회자들의 말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자랑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흔적을 안동서부교회, 한국국학진흥원 등에 전시되고 보존된 자료, 그리고 계명대 사회대 건물인 '봉경관'을 통해 어루만져볼 뿐입니다. 아버지의 흔적들을 보고나면 아버지를 만난 듯 반갑습니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해방된 조국이 지금은 세계 어디를 가도 대접받는 대한민국이 됐는데 그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보시고 계시겠죠? 아버지 덕분에 여섯 딸과 남동생도 잘 살아가고 있고 아버지의 손자·손녀, 증손자·증손녀들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잘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아버지 덕분입니다. 아버지, 정말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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