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파괴자가 돼버린 핵물리학자의 영광과 상처…리뷰 ‘오펜하이머’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전기 영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과학적 논쟁보다
정치적 상황과 인물의 고뇌에 집중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고도 1억 명 옥쇄를 준비하는 등 항복을 하지 않자, 미국은 대규모 상륙작전을 계획한다. 바로 일본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한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이다. 미군과 연합군 180만 명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다. 만일 이 작전이 실행된다면 미군 100만 명, 일본인 수천만 명이 희생될 것으로 예상됐다.

이 작전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발의 원자폭탄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원자폭탄은 인류의 재앙일까, 아니면 더 큰 희생을 막은 구원자였을까. 이 딜레마는 원자폭탄의 원죄였고, 프로메테우스가 당한 천형(天刑)과 같은 것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8월 15일 광복절에 한국에서 개봉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영광과 상처를 정치적 관점에서 뜯어 재조명한 전기(傳記)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즐겨 쓰던 과학적 논쟁이나 극적 장치 없이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다면적인 연대기를 다큐멘터리처럼 그려내고 있다.

핵물리학자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나치가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이 일을 맡았다.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면 당연히 나치에게 쓰여 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개발한 대량살상무기는 뜻하지 않게 일본에 투하됐다. 결국 종전을 앞당겼지만, 14만 명을 단숨에 죽인 무기의 개발자라는 죄의식은 그를 괴롭힌다. 힌두교 경전을 인용해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도다'라고 자조한다.

종전 이후 그는 트루먼 대통령(게리 올드먼)의 초대를 받아 이런 심경을 밝힌다. "각하, 내 손에 피를 묻혔습니다(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 이 말을 들은 트루먼은 대노한다. "피는 내가 더 묻었어. 저런 징징거리는 놈은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 사실 순진한 과학자의 넋두리로 이해해줄 수도 있지만, 트루먼은 그러지를 못했다. 오펜하이머의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핵폭발처럼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연쇄 반응하기 때문이다. 숙적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로 촉발된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에 휩쓸리게 되는 것 또한 그렇다.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미국이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하면서 오펜하이머는 영웅에서 스파이 혐의를 받는 신세로 전락한다. 소련에 정보를 넘긴 첩자로 오해를 받은 것이다.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고, 아내 키티(에밀리 블런트)가 공산당에 가입했던 것이 드러난 때문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영화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고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처럼 오펜하이머의 과학적 성과와 인간적 고뇌, 개인적 수난을 세 시간에 걸쳐 보여준다. 케임브리지 대학 시절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연구, 2차 대전이 시작되고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하는 과정, 이후 그의 성과들이 부정되고 사생활이 낱낱이 폭로되는 청문회 진행 등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세 가지 다른 시간대가 컬러와 흑백으로 교차 편집되면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특유의 플롯 분할 솜씨가 잘 드러난다.

컴퓨터그래픽 없이 재래식 폭약을 폭발시켜 구현한 핵폭발 장면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핵폭발과 후폭풍, 사운드를 나눠 그 섬뜩함을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청문회장에서의 곤혹스러운 상황이 핵폭발 장면과 오버랩되는 등 특히 이 영화의 사운드 효과는 그 어떤 영화보다 뛰어나 몇 번씩이나 깜짝 놀라게 한다.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킬리언 머피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핵물리학자의 복잡다단한 처지를 잘 연기한다. 외모 또한 오펜하이머와 판박이다. 그를 프로젝트 총책임자로 임명한 그로브스 중장 역의 맷 데이먼, 오펜하이머를 끌어내리기 위해 중상모략을 일삼은 스트로스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무게감 있는 배우들의 호연도 영화 보는 맛을 더해준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인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 '테넷'(2020)처럼 과학적 논쟁으로 지적 유희를 선사해 많은 국내 팬을 확보하고 있다. '오펜하이머'가 핵물리학의 개념을 시각화하지만, 2차 대전에서 영국군이 몰살당할 위기를 그린 '덩케르크'(2017)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다큐멘터리적인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세계를 구하려다 오히려 세계의 파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당시 정치적 상황을 통해 이해하기 쉽게 그려낸다. 그러나 전작들과 달리 극적인 서사나 흥미로운 비주얼이 약하다 보니 몰입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다. 긴장감을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좋겠다. 15세 이상 관람가지만, 뜻하지 않게 과한 노출이 있으니 자녀와 동반 관람 또한 조심. 러닝타임 180분.

김중기 영화평론가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