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설] DJ가 약속 어겼으니 우리도 약속 어겨도 된다는 정치 윤리 파탄

약속 이행은 인간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기본 윤리이다. 특히 말에서 시작해 말로 끝난다는 정치에서 약속 이행이란 신뢰의 가치는 더욱 그렇다. 공자가 말했듯이 신뢰가 무너지면 존립 자체가 무너진다. 신뢰는 정치인 아니 정치 그 자체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제1야당에서 신뢰는 중요하지 않다는 무서운 말이 나왔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5일 선거제 개편과 관련해 "모든 약속을 다 지켜야 하느냐"고 말했다. 연동형비례대표제 폐지와 위성정당 방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는 지난 대선 당시 '현 비례대표제 유지' '위성정당 금지'를 공약했으나 최근 이 대표는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며 파기를 시사했다. 정당 득표율만큼 비례대표 의석을 가져가는 병립형비례대표제로 회귀하고 위성정당도 창당하겠다는 것이다.

홍 원내대표는 그러면서 "정당이 때로는 약속을 못 지키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정계 은퇴 했다가 1996년 복귀해 대선에 출마했다"고 말했다. DJ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 대표와 지금 민주당도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는 정치 윤리의 전도(顚到)이다. DJ의 언행은 상도(常道)에 어긋나도 따라야 하는 행동의 준거(準據)라는 소리밖에 안 된다.

DJ는 대선에 앞서 열린 1987년 10월 8일 관훈토론회에서 "저는 일생에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정계 은퇴 번복은) 약속을 못 지킨 것이지 거짓말을 한 게 아닙니다"라고 했다. 국민을 우습게 아는 말장난이다. 약속을 못 지키면 이미 거짓말한 게 아닌가.

그런 점에서 DJ의 정계 은퇴 번복 거짓말에서 의미를 찾자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만 가치가 있다. 그런데도 DJ가 그렇게 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도 된다니 말문이 막힌다. 홍 원내대표의 말은 앞으로 민주당의 어떤 대국민 약속도 언제든 파기될 수 있는 준비된 거짓말이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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