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홍매화 열반

박상봉 시인

박상봉 시인
박상봉 시인

우수(雨水) 지나자 매화가 예쁜 꽃망울 터트린다. 매화가 수수한 자태를 뽐내며 봄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이른 봄소식을 전하고, 지리산 자락 아래 있는 화엄사에서도 홍매화가 예년에 비해 2주 빨리 핀다는 소식이다.

홍매화로 붉게 물든 열반의 풍경을 머릿속으로만 그리고 있자니 몸살이 난다. 당장 화엄사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요동치나 먼 길 떠날 자신이 없어 망설이고 있었다. 엊그제 오후 날씨가 꾸무리하고 마음이 울적해 한 번도 안 가본 행선지로 기차를 골라 탔는데 천상의 선녀가 내려온 듯 아리따운 홍매 아가씨를 기어이 만나고 말았다.

화엄사가 아니고 통도사다. 동대구역에서 울산(통도사)역까지 30분도 안 걸렸다. 역에서 통도사 입구까지는 택시 타고 20분. 통도사가 이리 가까운 곳에 있는 줄 까맣게 몰랐다. 젊은 시절부터 꽤 오래 마음에 담고 있던 절집이었는데 막상 가려고 하니 부산 갔다가 버스 갈아타고 한참을 더 가야 한다고 생각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소싯적에 청도 운문사 찾아가는 길에 고생을 하도 많이 해서 절집 찾아가는 행로에는 자신이 없었다.

동대구역에 의외로 통도사행 KTX 기차가 있어 불쑥 울라 타고 와서 난생처음으로 통도사 경내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통도사에 유명한 홍매가 있는지 언제쯤 피는지, 사전 지식 하나 없이 갔는데 진분홍 꽃망울 터뜨린 영산전 홍매와 영각 자장매를 만났다. 영각 앞에 있는 자장매는 만개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홍매를 둘러싼 상춘객들로 북적북적했다.

수령 370년 된 자장매는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심은 매화나무로 율사의 이름을 따서 자장매로 불린다는데 자장매가 그리 유명한 매화인 줄 몰랐다. 절간에서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홍매화.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는 얼마나 황홀한지. 영산전 꽃살문 넘어 활짝 핀 매화의 자태는 마치 열반의 세계를 넘나드는 것 같이 보였다.

"붉게 물들인 경내에서/ 열반의 소망은 붙었다 꺼지는 심지/ 그을음만 남을 줄 알면서/ 터진 꽃망울 걷어차고 간 흰 구름에게/ 염화미소가 부처의 답이다." (이복희 시인의 '홍매화 열반' 중에서)

한반도에 봄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하는 홍매화가 꽃망울 터트린 통도사에는 화사하게 핀 자장매에 이어 아름다운 만첩홍매와 멋스러운 능수매화까지 앞다퉈 피어나고 있다. 일주문까지 약 1km 거리로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마치 춤을 추듯 어우러진 무풍한송로 따라 영축산을 내려오는 길에는 통도사를 휘돌아 내려오는 계곡의 물소리가 봄맞이 나온 산새 지저귀는 소리로 들려 봄이 우리 곁에 가깝게 와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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