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의대 증원’, 과학적 접근으로 해결해야

김우석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
김우석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

이번 주 집에 있던 책을 10박스는 버렸다. 이사 준비의 핵심은 이사 비용과 직결되는 책 정리다. 선별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오래 가지고 있던 책일수록 더 힘들다. 그중 유독 눈에 띄었던 책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였다. 칼 세이건이 유명해진 것은 1980년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코스모스'(Cosmos)의 해설자로 활약했을 때부터다.

이후 1960년대생의 학창시절을 함께했던 오랜 친구가 됐다. 필자도 이 TV 프로그램를 보며 과학에 눈을 떴고, '코스모스' 책을 구입해 끼고 다녔다. 뭔가 세련된 지식과 함께한다는 뿌듯함과 젠체하는 심리에 가장 적합한 아이템이었다.

우리 세대의 과학은 이상이자 대중성이었다. 공부를 가장 잘하는 학생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지망했고, 어린이들의 최고 희망 직종은 '과학자'였다. 우리나라 학교 수학 과정도 물리학을 기본으로 한다.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물리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학적으로 체계화한 미적분을 우리나라처럼 수학의 기본으로 삼는 나라는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런 교육과 문화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과학 입국과 기적적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근래 수학과 과학에서 세계적으로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이루고 있는 것도 이런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모두 의대를 목표로 한다. 우수한 인재가 의사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의대가 블랙홀같이 모든 우수한 학생들을 빨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다. 지인의 아들이 과학고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지인은 과학고에서 받았던 경제적 혜택을 모두 토해 내고 의대에 보냈다. 특별히 의사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고, '의대를 못 가면 사람들이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대를 보냈다'고 했다.

다른 지인은 아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억지로 의대에 보냈다. 그 이후 부자 관계가 파경에 이르렀고, 아이는 의대를 졸업하고 연락도 없이 몇 년째 혼자 세계 일주 중이란다. 또 어떤 학생은 억지로 의대에 합격하고는 '이젠 됐죠'라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한편, 소명 의식을 갖고 의사를 꿈꾸었으나 성적이 미치지 못해 재수, 삼수, N수를 하거나, 외국에 나가 의대에 입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반면, 한강의 기적을 만든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경쟁력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당장 우수한 프로그래머가 부족해 우리나라 최첨단 기업들이 쩔쩔매고 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외국의 우수 프로그래머를 영입해야만 한단다. 우리나라에도 고급 인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안정적인 직업'인 의사에 쏠리기 때문이다.

혹자는 의료 과학을 폄훼한다고 할 수도 있다. 제약산업 등 의료산업이 황금알을 낳는 산업은 맞다. 하지만 '의대 쏠림'이 의료산업의 발전을 견인하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의사 과학자는 전체 의사의 1%도 안 된다. 미국의 4%는 물론이고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란다. 의사 과학자를 하려 해도 '임상의사에 뒤처질 것 같아 선뜻 나서지 못한다'는 인터뷰를 본 기억이 있다. 이래서야 어떻게 의료 과학이 발전할 수 있겠는가.

우수 인재의 '의대 쏠림'은 국가적으로나 의사들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은 현상이다. 의대 정원을 늘리면 단기간에는 더 많은 우수 학생들이 의대로 몰리겠지만, 수년 후에는 분산 효과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양자컴퓨터, 핵융합발전, AI-로봇산업 등 대박 신화가 가능한 분야에 최고의 인재가 늘어날 것이다.

신약 개발 등 부가가치가 큰 의료산업에도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성장 동력은 더 강력해질 것이다. 그때도 서구 선진국들처럼 최고의 인재들 중 상당수는 의사가 될 것이고, '봉사 정신'이 넘치는 유능한 의사들도 늘어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모두 필자와 같이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최근 개최된 영수 회담의 유일하다시피 한 공감대가 '의료 개혁'과 '의대 증원'이다. 요령이 아쉬웠지만, 정부의 정책 방향은 옳았다는 증거다. 과학의 기본 정신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정부 당국자와 의사 선생님들이 감정이 아닌 과학으로 문제를 풀어 가길 바란다. 천사와 악마가 함께 숨어 있는 디테일에 더욱 진솔한 협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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