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성미의 마음과 마음] 내 마음속, 깊은 상처를 위로하며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5월에 문상갈 일이 잦았다. 꽃이 만발한 계절에 한 생이 피었다가 지는 장례식장 풍경은 더 슬프다. 상을 당한 사람은 슬픔으로 감정이 마비 될 정도로 마음의 상처가 생긴다. 며칠간 슬픔에만 빠져있다면, 에너지가 소진되어 일상으로 복귀가 힘들 것이다.문상은 슬픈 이들에게 휴식을 주는 고귀한 일이다.

문상객과 인사도 나누고, 상을 당했어도 밥은 잘 먹어야지. 챙겨주는 분들 권유에 식사도 하게 되고, 휴식도 취하면서 슬픔에만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고인의 젊은 날의 추억과 생기를 끄집어내어 속절없는 세월과 허무를 달래기도 하고, 잠시나마 삶의 희노애락과 생노병사의 공통 주제로 공감하면서 각자의 남은 인생에 대한 소망을 지긋이 다지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죽음은 갑자기 당황스럽게 찾아오기도 하지만, 오래 준비한 죽음은 새로운 인생 여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위안을 삼기도 한다. 죽음 뿐아니라 모든 상처는 이렇게 더불어 치유될 수 있다.

40대 미혼 여성이 사람만나는 것이 두렵다고 찾아왔다.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떠났고 다른 가정을 꾸렸다. 이 분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다 싫어할 것 같고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눈치만 보이고 불안해서 대인관계를 꺼렸다.

점점 친구도 없어지고 직장도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세상의 남자들이 아버지처럼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마흔이 넘도록 결혼도 피했다. "병원에서 치료받아본들 아무 것도 바뀔게 없는데 치료가 무슨 의미가 있나요." 라고 했다.

모든 기억은 감정으로 채색되어 저장된다. 불안감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란색 필터로 세상을 보면 모두 파랗게 보이듯이, 기분이 우울해지면 부정적인 생각만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괴로운 감정 때문에 아픈 기억이 자꾸 떠오르고, 그 일이 생각나면 다시 기분이 나빠지는 악순환을 겪게 된다.

스스로 고르디아스의 매듭(Gordian knot)처럼 단칼에 해결이 어려운 경우,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상처로부터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치유해가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과거의 상처가 깊었다고 할지라도 주변의 도움과 여러 기법들을 통해서 상처는 회복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약물치료는 뇌 속에 신경 전달 물질들의 균형을 맞춰주고, 상담치료는 평소에 잊고 지냈던 속마음을 털어 놓음으로써, 뇌가 활성화된다. 치료를 한다고 해서 갑자기 마약이라도 한 듯이 달라지진 않지만, 조금씩 잠도 자고 식사도 좀 하게 된다. 밤에 잠을 잘 수 있으니 뇌가 휴식을 취할 수 있고 걱정이 많이 줄어든다.

정말 힘들었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선생님. 여기 원래 그림이 있었어요? 정말 색감이 좋군요." 진료실에 몇 번이나 다녀간 분인데 그림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환자가 좋아지는 싸인이다.

팔이 부러져도 한 달간 기브스 하면 말짱하게 낫는데, 왜 마음의 상처는 오래 가는 걸까. 첫째 이유는 원래 인간의 뇌는 아픈 기억은 오래 남도록 진화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적이 오면 반사적으로 숨어야 생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파충류의 뇌라고 하는 변연계는 여전히 구석기 시대다.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자꾸 피하고, 생각을 더 이상 안 하려고 한다. 그 이야기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떠올리기도 싫어요. 실제로 사건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경우도 많다.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상처를 싸매고 살아온 나의 환자분은 상담을 통해, 어린 시절 아버지와 참 행복했던 시간도 있었고, 아버지는 내가 미워서 떠난 게 아니라 어머니와 헤어지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대화 치료를 통해 이 지점까지 파악을 하게 되면, 아프지만 빠져나오기가 쉬운데, 본능적으로는 기억이 떠오르자마자 회피하고 억누르기만 하면 마음의 골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둘째 공포는 점차 오류를 만들어내고 점점 커지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는 오래 간다. 아버지가 무서웠던 사람은 비슷한 연배의 상사만 봐도 겁이 나고, 남들이 싸우는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비행기에서 심하게 흔들린 적이 있다면, 비행기뿐만 아니라, 차 타는 것도 무섭고, 엘리베이터 타는 것도 피할 수 있다. 내 맘대로 내리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오해가 생기면서 공포가 자꾸 확장되어 간다.

마음의 상처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힘을 방어력이라고 한다.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세련된 방어력을 가지고 있는지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중요하다. 이것은 잘 살아오신 분들이나 롤 모델로 삼을 만한 분들의 삶을 보면서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다. 남을 탓하거나 자기 비난으로 에너지만 소모시키지 말고 어떤 대책을 세울 것인지 갈림길에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시련을 견디어내는 사람은 아름답다.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