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성미의 마음과 마음] 세상이 우리를 속일때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정신과에는 어떤 사람이 가장 많이 오나요?"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지금까지 정신과 의원을 25년 남짓 해오고 있는데 가장 많이 호소하는 증상은 불면증이고, 배신당한 경험으로 아픔을 호소하는 분들이 가장 많다.

어제 박세리 프로의 눈물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의 반복적인 채무 문제와 사기 행각으로 아버지를 고소하는 결단까지 한 심정이 오죽했을까. 가장 기본적인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에게서 배신당한 것 아닌가. 힘들었던 시간들을 억척스럽게 극복한 박세리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성취를 이루어낸 인물이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이고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았는데, 지금 이 순간은 세상에 홀로 된 외로움으로 가장 힘든 사람이 아닐까. 그 단절의 적막감을 어떻게 견딜까.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편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들이 추구하는 편한 상태는 사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좋지 않다. 편할수록 신체적 활동이 줄어들고, 활동이 줄면 밤에 잠이 잘 오지 않고, 낮에 무기력해지기 쉽다. 뇌신경 세포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연결되는데, 경험을 많이 할수록 많이 연결되어 치매가 예방된다. 아무 것도 안 하고 편하게 있게 되면, 있던 것 마저 끊어지면서 뇌는 급속히 망가진다.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지역의 사람들은 인간관계 스트레스에 더 많이 시달린다. 이해관계로 얽혀서 서로 부딪히고 오해가 생기고 사람에 대한 불안감이 높다. 공동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나 제약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많다. 흡연, 층간소음, 주차 문제 등 시시비비 가릴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람이 만든 집단은 완벽하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남의 빈틈을 귀신같이 찾아내서 이용하려는 사기꾼도 많다. 과거에는 사람 말을 어떻게 안 믿느냐고 했지만, 요즘에는 사람을 어떻게 믿느냐가 상식이 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서로 믿지 못하고 외면하고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우울해지고 자살도 많다.

그래서 믿을 사람은 없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을 찾다 보니 돈 주고 살 수 있는 최고의 친구가 정신과의사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정신과 진료는 마더링 케어(mothering care)를 해주는 공간이다. 엄마처럼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기다려주는 것이 진료의 원칙이다.

남에게 뒤통수 맞았다거나 버림받아서 세상이 두려울 때, 안전한 지대인 정신과를 찾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신과가 많이 생기는 곳이, 서울에서는 강남이고 대구에서는 수성구다. 소위 돈 많은 사람들이 산다는 곳인데 마음이 힘든 사람은 더 많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타적 유전자>의 저자 매트 리들리는 "오늘날과 과거의 소규모 사회에서 폭력에 의한 죽음은 매우 흔했다. 루소가 말한 '고결한 야만인'보다는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자연 상태의 인간을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했다.

원시 사회에서는 힘센 자가 약자를 처단하고 변방으로 쫓아냈다. 집단에서 밀려난 사람은 가장 안전한 곳인 동굴로 숨어들었다. 이것이 요즘의 히키코모리다. 사회가 각박할수록 피해의식이 많아지고 히키코모리가 늘어난다. 사람이 두려워서 외출을 꺼리고 누구라도 마주칠까봐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으로 숨는다. 상대가 자신을 비웃거나 공격한다고 느끼면 먼저 상대를 공격하는 묻지마 폭행이 그렇다. 우리 사회가 원시 사회로 회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장기간 혼자 고립되어 있다 보면 내면의 원시 본능이 투사되어,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고 마치 현실같이 느낀다. 그래서 적당한 사회생활은 무조건 필요하다. 일본에서 부동산 업자들이 혼자 사는 사람에게 집을 세주지 않으려고 한단다. 혼자 살다가 고독사라도 하면 임대해 준 집값이 폭락할 것이고, 치매라도 생기게 되면 그 사람을 관리해 줄 수가 없어서 그렇다는 거다.

명품 열풍도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려는 욕구에서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기꾼들일수록 비싼 외제차나 명품을 가지고 다니고 자기를 과시하려고 한다. 진짜 명품 인간은 자기를 증명할 길이 많으니까 명품이 필요 없다.

릴케는 <엄숙한 시간>이란 시에서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다고. 우리는 모두 저마다 세상의 한구석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정녕 혼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은 비록 힘들지만 슬픈 사람끼리, 아픔이 있는 사람까리 연대하며 도우며 희망의 여린 빛으로 환하게 피어나길 바래본다.

김성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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