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은 대한민국 여느 도시들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는 굳이 국적을 따져 묻고 싶지 않다. 시내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강줄기와 너르고 비옥한 서전벌, 벼·옥수수·콩·깨 등 곡식과 밭작물이 빈틈없이 자라는 야산과 구릉의 비옥한 전답은 여기가 타국인지조차 잊게 한다. 용정은 전체 인구의 70%가 조선족이다. 거리를 다니다 보면 한국말로 대화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고, 한글과 중국식 한자(간자체)가 병기된 간판은 뭣하나 낯설 것 없이 우리를 맞이한다.
◆ 순수 조선인의 땅 용정, 지명의 기원이 된 용두레 우물
용정 시내 한복판에 유서 깊은 우물이 있다. 이 물이 아니었다면 용정은 없었을테고, 영원히 황무지로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1997년 대한민국 거제시와 중국 용정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우물이 있는 곳에 거룡우호공원을 만들었다. 공원에 들어서면 '용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 쓰인 비석과 돌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우물이 보인다.
'용정(龍井)'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것은 '용두레 우물'로, 용정현 인민정부에서 복원해 놓은 것이다. '용두레'는 통나무를 배 모양으로 길쭉하게 파, 고여 있는 물을 다른 곳으로 퍼 옮기는데 쓰는 한국의 농기구다. 아마도 샘을 파 용두레를 달아 물을 길어 쓴 것에서 유래된 지명인 것이다.
북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에겐 살 만한 땅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세상에 땅은 넓어도 사람이 몸 붙이고 마음 열어 살아갈 땅을 찾는다는 건 쉽지 않다. 마른 황야에서 살 땅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한 줄 물줄기는 신의 축복과도 같았다. 조상들이 그랬듯 담을 쌓고 생명의 원천이자 풍요의 기원인 우물을 정성스럽게 관리했다. 한 집, 두 집 우물 주변에 모여 살기 시작했고 촌(村)을 이루고 도시를 이루었다.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의 시작이 된 서전벌
1919년 2월, 조선 땅에 만세운동이 일 거라는 소식과 일본 유학생들의 동경 독립선언문 소식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왔다. 두 소식은 만주 벌판까지 술렁이게 했다. 일제의 억압과 친일 중국인의 감시아래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던 간도 지역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암암리에 소식통을 열어 거사를 준비했다. 집결지는 용정의 북쪽 서전벌이었다.
용정은 조선인의 북간도 개척사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이자 정신적 수도와도 같았기에 상징적 의미가 컸다. 은진중학교 지하에서 독립선언서와 거사에 필요한 모든 문건이 등사되었다.
3월 13일 학생, 농민, 상인 등은 신분과 지위, 나이를 막론하고 서전벌(서전대야)에 모였다. 두만강변의 정동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하룻밤을 꼬박 북을 울리며 걸어 당일 아침에 도착했다. 용정 시내의 은진중학교, 동흥학교, 대성학교 학생들도 속속 당도했다. 모두 태극기를 앞세우고 있었다.
독립선언포고문이 낭독되자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함성이 우레와 같았다. 태극기를 든 조선인은 소름 끼치도록 기뻐 흐느끼며 뛰었다. 기름진 평야와 완만한 구릉이 만세 소리로 진동했다. 이윽고 '대한독립' 깃발을 앞세우고 일본총영사관이 있는 용정 시내로 향했다. 만세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일제의 압박에 친일 중국인 동북군벌 장쭤린은 일본영사관과 거류민 보호 지시와 함께 발포 명령을 내렸다. "탕, 탕, 탕!" 용정 한 복판에 난데없는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일제 통치 억압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히는 비폭력 평화 만세 행진에 누가 무참히 총을 겨누었단 말인가.
◆간도총영사관 지하에는 아직도 서늘한 기운이
옛 간도 일본총영사관 건물로 들어선다. 지하는 한여름임에도 한기가 가득하다. 어두컴컴한 실내와 습하고 비릿한 냄새가 무척 거북하다. 처음도 아닌데, 혼자도 아닌데 두려움도 여전하다. 서늘함이 등골을 훑는다. 모진 고문과 비명이 가득했을 건물을 둘러보는 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극도의 불안이 엄습한다.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 같은 공포란 이런 것일까.
1909년 용정 시내에 막강한 경찰 조직과 수감 시설까지 갖춘 주재 일본총영사관이 설치되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상 만주 침략과 수탈, 밀정들을 부려 조선독립운동을 감시하고 억압하겠다는 의도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흑백의 사진들, 사진 속의 애절하고 절망한 사람들의 눈빛과, 오라에 묶여 죄수처럼 끌려가는 퉁퉁 부은 민간인의 얼굴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얼비친다. 그리고 또 다른 사진들, 절제된 복장과 총검을 갖춰 맨 일경들의 도열과 말(馬)을 타고 시민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서늘하다 못해 살기마저 돈다. 사진이 현실인 듯 생생하다. 저 총검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누구를 향한 것인가. 선한 말(馬)에 채찍을 가해 어디로 달려 나가 누구를 해한 것인가. 만주 벌판에 함부로 널브러진 저 사진 속 형체는 정녕 사람의 몸뚱어리인가.
◆ 조선인의 심장 용정에 학교 세운 이상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전서숙(瑞甸書塾) 옛터'가 있다. '서전서숙'은 용정 일대의 넓은 평야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따온 이름이다. 지금은 조선족 학교인 '용정실험소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출입을 제한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문밖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 옛터'임을 새겨 놓은 돌비석을 보며 이상설(李相卨, 1871~1917) 선생을 생각한다.
선생은 조선이 주권을 잃자, 모든 재산을 정리했다. 이동녕, 정순만 등과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를 거쳐 만주로 망명했다. 1906년 사재를 내어 용정에 연변 내 최초 조선족 근대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웠다. 조선인 민족 교육에 태동과도 같았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역사와 수학, 지리, 정치와 국제법 등 신지식을 가르쳤고, 민족 교육과 항일독립운동사상을 심으며 유능한 조선의 인재로 키우고자 했다. 서전서숙은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학교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로 오래가지 못했다. 설립 2년째 되던 해 '간도보통학교'로 바뀌었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직마을에서 태어난 선생은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과 러시아 등 타국을 떠돌다 1917년, 봄을 앞둔 3월 눈을 감았다. 향년 48세였다. 임종을 지킨 이동녕 등은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 유해를 화장했다. 선생의 문고와 유품도 함께 태워 재를 바다에 뿌렸다.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난 선생의 넋은 조선이 독립될 때 한없이 가벼워졌을까.
용정실험소학교 한편에 세워진 이상설 정자를 바라본다. 닫힌 학교 문을 넘지 못하고 마음으로나마 현판의 먼지를 닦고 거미줄을 걷어낸다. 나라의 주권 회복을 위해 마지막까지 타국을 떠돌아야 했던 선생의 숭고한 선구자적 정신에 한없는 존경심이 인다. 우리는 교문 밖에서나마 손을 모으고 각자의 방법으로 선생을 애도한다.
용정 시내를 빠져나와 동남쪽 교외의 양지바른 언덕에 이른다. 3·13 시위에서 희생된 분들의 유해가 안장된 묘지다. 무덤엔 그날 서전벌에 모인 조선인의 함성처럼 여름 풀이 무성하다. 풀이, 풀이 하늘을 향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곧게 키를 돋운다. 묘지가 한없이 푸르다.
박시윤 답사기행 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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