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 가(家)를 설문해자 해본다. 지붕 아래 돼지가 거주하는 모양. 가축의 첫단추가 바로 돼지 인 셈. '돼지국밥'에는 '야성'(野性)이 투영된다. 부산 출신 시인 최영철도 부산돼지국밥을 겨냥한 시 '야성은 빛나다'를 지었다.
이걸 먹을 때면 자신이 바닥권으로 내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짐승스러움' , 혹은 '마성'(魔性)의 식감 때문일까? 사실 동양권에서는 유구한 세월, 돼지고기는 제수의 으뜸 자리를 차지했다. 무속인들은 하늘의 뜻을 땅으로 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 짐승을 날 것 상태로 봉헌한다.
능히 '신육'(神肉)이랄 수 있다. 돼지국밥 한 그릇 합시다, 그보다 더 살가운 말이 또 있을까 싶다.
◆ 별미 돼지고기
돼지고기는 '국민 먹거리'. 특히 삼겹살은 팔도가 모두 성지랄 수 있다. 전북 진안에 가면 태아 같은 돼지를 갖고 '애저찜'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제주도는 쇠고기가 인기가 없다. 돼지고기만 '슈퍼갑'의 대우를 받는다. 잔칫날에는 아강발(족발)과 사골을 넣어 우려낸 육수에 몸(모자반)을 넣어 '몸국'을 끓인다. 돼지수육도 쟁반에 담지 않고 돔배(도마)에 얹는다. 돼지국물에 중면을 결부시켜 고명으로 삼겹살을 올리면 '제주국수'가 된다.
요즘은 살코기보다 특수부위 뒷고기파들이 급증하고 있다. 혓바닥, 위의 한 부위인 오소리감투, 마구리, 설깃살, 모서리살, 덜미살 등이 식문화의 외연을 넓혀주고 있다. 이밖에 대구식 돼지찌개와 짜글이 등도 가세 중이다.
돼지국밥의 도시? 어딜까. 단연 부산을 축으로 그 외곽에 대구와 밀양이 투톱이다. 물론 순대국밥도 팬덤이 상당하다. 남부지방과 달리 중·북부 쪽으로 가면 순대국밥이 강세.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이화시장,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군산시 조촌동, 인천시 동구 송현동, 속초시 청호동 등에 '1급 순대국밥거리'가 산재해 있다.
◆부산권 돼지국밥 줌인
부산은 한때 제분·피혁·신발·섬유산업의 메카. 60년대 전후 수출 중심 경제개발정책에 따라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인근 경남 등의 농촌 지역 인구가 대거 유입됐다. 1955년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한다.
타향인들의 입맛을 가장 잘 달래줄 음식은 뭘까. 바로 저렴하고 빨리 먹을 수 있는 돼지국밥 만한 게 없었다. 부산 산업화의 제1원동력이었다. 창녕, 밀양, 진주, 거창, 합천, 하동 등 떠나온 자기 고향이 상호로 애용되는 것도 그 방증 중 하나다.

부산 원도심 '수정시장'은 부산 돼지국밥 1번지. 근처 산복도로 주민들과 오랜 세월 애환을 같이해 왔다. 수정시장의 또 하나 자랑거리가 바로 '돼지뽈수육'. 수정시장 돼지국밥은 특이하게 삼겹살 대신 머릿살로 국밥을 만든다. 대구의 봉덕시장 국밥과 비슷한 포스다.
부산 돼지국밥은 주재료에 따라 크게 사골·살코기·머릿고기 베이스 국밥으로 삼분된다. 사골로 육수를 뽑는 건 설렁탕처럼 뽀얗다. 이걸 부산에서는 '밀양식' 돼지국밥이라 한다. 가장 흔한 스타일인데 서면 롯데호텔 뒤편 '송정돼지국밥' 등이 유명하다.
부산 돼지국밥집 중에서 사업자등록을 낸 최초의 국밥집으로 불렸던 중구 중앙동의 '하동집'이 맏형격인데 안타깝게도 명맥이 끊어졌다. 많은 문화계 인사가 여길 들락거렸다. 현재 부산 국밥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업소로 불리는 부산역 앞 '평산옥', 여기 가면 밥 대신 소면을 말아준다.
1951년 오픈한 연제구 연산동의 '경주박가국밥', 남구 대연동의 '쌍둥이돼지국밥',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 등장한 동구 범일동 국밥집 '마산식당', 유자청 소스가 돋보이는 동래시장의 '재민국밥', 구포시장 근처 '덕천고가' 등도 주목을 받는다. 수영구 민락동의 '자매돼지국밥'은 모르긴 해도 부산에서 가장 간이 세다. 강서구 신호동 '수복가마솥돼지국밥'은 '옻돼지국밥'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에선 분식점만큼이나 흔한 돼지국밥집이지만 유독 서울만 가면 박살이 났다. 하지만 그 불문율을 깬 식당이 있다. 바로 서울 강남 한복판에 문을 연 돼지국밥집 '용두산'이다. 2002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국밥집을 차렸다. '돈수백'은 서울 토박이가 차린 돼지국밥 전문점. 4년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비법을 익혔다. 가게 이름을 '돼지국밥 먹고 백 살까지 살라'는 뜻의 '돈수백(豚壽百)'으로 지었다.

◆보부상 국밥 덕천고가
부산 돼지국밥 중 가장 독특한 형태는 바로 구포시장 근처에 있는 '덕천고가'. 주인 권경업은 히말라야급 산악시인. 그가 생계를 위해 구포보부상이 즐기던 구한말의 장국 재현에 나섰다.
한말 부산시 북구 덕천동 부근에 살았던 김기한이라는 거상이 있었다. 김기한의 덕천객주에는 김해·양산 일대 보부상, 거간꾼, 목도꾼, 뱃사람 등 수십 명의 식솔들이 매일 들락거렸다. 그때 끓인 국밥이 낙동강 칠백리 물길을 통해 영남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권경업이 덕천객주 김기한가의 장국 비법을 이어받는다. 김기한은 식객을 위해 돼지고기로 만든 '장국'을 낸다. 그 모양은 고춧가루가 들어가 '돼지육개장' 같다. 부산에선 탕(湯)을 '땡'이라한다. 진탕을 '진땡'이라고 한다. 장국을 만들려면 우선 진땡부터 만들어야 한다. 진땡에다 조선된장을 풀고 우거지, 부추, 고추, 마늘, 파 등을 넣어 끓인 '장국'. 육개장, 시래기국, 설렁탕, 돼지국밥이 하나로 합쳐진 형태다. 한국 객주가의 국밥 원형을 발견할 수 있어 식품사학적으로 귀중한 공간으로 보인다.
◆밀양 돼지국밥
밀양 돼지국밥은 일본 강점기 고(故) 최성달씨가 밀양 무안면 시장터에 '양산식당'이란 국밥집을 선보이면서 그 신화가 생겨난다. 여긴 다른 집과는 달리 돼지뼈와 쇠뼈(우골)를 섞어서 육수를 만들기 때문에 국물이 맑다. 그 후 며느리인 김우금 할머니가 현재의 무안 식육식당에서 밀양 돼지국밥 브랜드를 형성시킨다. 현재 김 씨의 아들 3명의 무안 식육식당(첫째 아들), 제일 식육식당(둘째 아들), 동부 식육식당(셋째 아들)이 근처에서 장사를 한다.

◆대구의 돼지국밥
한국전쟁 직후 서성로에서 대구의 첫 돼지국밥촌이 형성된다. 한때 한강 이남 최고의 공구상거리였던 서성로. 대구의 첫 돼지골목으로도 유명하다. 50∼60년대 1기, 70년대초 2기 식당이 생겨난다. 1기의 대표주자는 지금은 사라진 '서성식당'(주인 정순연씨는 작고). 그 다음 순대·수성·김천·대구 식당이 서성식당과 함께 골목 초입 모퉁이 한 건물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현재 이 골목을 지키는 건 팔번식당과 이모식당, 딱 두 집뿐이다. 돼지골목을 만드는데 택시 기사가 '수훈갑'. 80년대만 해도 하루 300대 이상의 영업용 차량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기사에겐 1천원의 할인혜택이 주어졌다. 나중엔 그게 주차난의 원인이 된다.
60년대초만 해도 이 골목 안에선 공공연하게 '밀도살'이 성행했다. 가마니 위에서 모두 6각(6등분)을 쳤다. 앞다리 2개, 뒷다리 2개, 갈비짝 2개. 단골들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들으면서 태연스럽게 국밥을 먹었다.
이 골목에서 가장 이야기 거리가 많은 식당은 '팔번식당'이다. 그 식당이 갑자기 유명해진 건 순전히 전두환 대통령 때문. 전 대통령은 12·12로 정권을 잡은 뒤 고향인 합천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비서진은 수육을 어디서 주문할 건가를 놓고 고심한다. 어느 날 서성로 한 찻집에 군 관계자 3명이 나타났다. 입이 무거운 주인을 물색했다. 관상을 본 결과 그 식당 여주인이 당첨된다. 돼지 3마리를 잡았다. 밤새워 고길 장만했다. 훗날 현장답사 나온 장교 한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 대통령도 고기 맛에 만족했다'고 귀띔해주었다. 졸지에 이 식당은 전 대통령이 미는 식당으로 주목받는다.
◆처음에는 국밥보다 수육
요즘은 돼지국밥이 주력. 하지만 70년대만 해도 상가·잔칫집, 회사 회식 및 야유회용 수육·편육 주문이 쇄도했다. 암퇘지 자궁인 '암뽕'은 특히 대구에서 인기다.

대구에는 시장 안에 들어선 돼지국밥촌이 몇개 있다. 봉덕‧명덕시장이 맏형격이다. '봉덕시장' 권에는 20여개 업소가 밀집해 있다. 김천, 삼정, 영천, 청도 등이 축을 잡고 있다. 근처 명덕시장도 영천국밥 등 10여개가 모였고 시내 중앙상가에는 군위식당 등이 모여 있다. 외곽에는 '파크국밥', 대명동 '밀양국밥', 성서 '고령국밥' 등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봉덕시장 국밥은 돼지머릿살의 여러 부위를 주섬주섬 얹어준다. 그리고 고명으로 된장과 고추양념장을 올리는 게 특징이다.
◆대구 부산 밀양 특징
밀양식 돼지국밥은 부산과 달리 부추를 사용하지 않는다. 밀양은 비계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사골 육수를 낼 대 쇠뼈 삶은 물을 섞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부산으로 오면 부추는 필수. 육수에 직접 넣거나 그렇지 않으면 젓갈에 무쳐 곁반찬으로 낸다. 부산은 대구와 달리 내장 부위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부산은 부추인데 대구는 썬 파가 선호된다. 또한 된장과 고추양념을 고명으로 올리는 게 대구의 한 특징이다.
wind30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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