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행이 들려주는 마케팅 이야기-하태길] 스톤헨지에서 바스까지 인류의 시간을 새기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신석기 거석문화의 정수 스톤헨지. 하태길 영남대 겸임교수
신석기 거석문화의 정수 스톤헨지. 하태길 영남대 겸임교수

런던까지 와서 스톤헨지(Stonehenge)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이집트에 가서 피라미드를 보지 않는 것과 같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거석들이 바람 부는 평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스톤헨지는 영국 남부 윌트셔(Wiltshire) 주 솔즈베리 평원(Salisbury Plain)에 자리한 선사시대 유적이다. 인류의 거석문화를 상징하는 이곳은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과도 견줄 만하다.

◆스톤헨지, 시간을 마주보다

버스를 타고 평원을 달리던 중, 저 멀리 스톤헨지가 실루엣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첫인상은 생각보다 작게 느껴졌지만, 아마도 미디어 속 이미지가 워낙 거대하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안내 센터에서 스톤헨지의 역사와 의미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뒤, 나는 정중한 마음으로 다가갔다. 도구 하나 제대로 없던 시대에 누군가는 이 돌들을 끌어와 세웠다. 무엇을 믿었기에, 어떤 마음으로 이 광활한 평야 위에 구조물을 남겼을까.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의미를 상상해 본다.

스톤헨지는 약 4,500년 전 세워진 구조물로, 신석기 시대 거석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태양과 달의 위치에 맞춰 배치된 것으로 보아, 하지나 동지 같은 천문 현상을 관측했을 가능성이 크며, 종교적 의식과 장례가 이뤄졌던 성스러운 장소였을 것이다. 고대인들이 거석의 위치와 방향을 정하던 방식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위성지도를 설계할 때의 사고방식과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조율하고 공간을 정교하게 구성한 인간의 기술 덕분에, 우리는 이제 손끝으로 중심부를 돌리며 태양과 그림자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시간 너머의 대화가 시작된다. 대화는 상상을 부르고, 상상은 기술과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 상상은 이제, 마케팅과 만난다.

시간을 습격한 스톤헨지의 존재감. 하태길 영남대 겸임교수
시간을 습격한 스톤헨지의 존재감. 하태길 영남대 겸임교수

잉글리시 헤리티지(English Heritage)는 증강현실(AR) 기술을 통해 스톤헨지를 새롭게 조명했다. 수천 장의 실제 사진과 3D 모델이 결합 된 이 프로젝트는, 문화유산과 기술의 만남이라는 마케팅 포인트를 만들어냈다. AR로 만나는 스톤헨지는 물리적 여행 이후에 비로소 시작되는 '두 번째 여정'이 되었다. 또한 스톤헨지의 상징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브랜드도 있다. 삼성 갤럭시 S8는 테두리 없는 디자인을 강조하기 위해 스톤헨지 조형물을 설치하였고, 영국 자동차 브랜드 랜드로버(Land Rover)는 스톤헨지를 배경으로 어떤 지형에서도 견딜 수 있는 차량의 내구성을 강조했다. 영국 전통 양조장인 스톤헨지 에일(Stonehenge Ales)은 고대의 맥주 양조법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화이트 호스 에일(White Horse Ale) 광고를 통해 전달했다. 돌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이 맥주잔을 비추는 장면은 고대와 현대를 감각적으로 연결한 헤리티지 마케팅(Heritage Marketing)의 대표적인 사례다.

스톤헨지의 비밀을 엿보다 푸드득 날아가버리는 까마귀 한마리. 하태길 영남대 겸임교수
스톤헨지의 비밀을 엿보다 푸드득 날아가버리는 까마귀 한마리. 하태길 영남대 겸임교수

셔틀버스를 타고 유적 가까이 내려 평원을 걷기 시작했다. 전날 내린 비로 촉촉해진 땅 위에서, 습기를 머금은 스톤헨지는 더욱 짙고 또렷하게 다가왔다. 거석 사이로 감탄을 나누는 사람들, 조용히 셔터를 누르며 유적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는 여행자들, 그리고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듯한 깊은 시선들.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이곳의 분위기는 차분했고, 깊은 사유로 가득했다.

그때, 한 마리 까마귀가 돌 위로 날아들었다. 마치 고대의 비밀을 엿보다 놀란 듯이 허공을 가르며 사라지는 모습은 상상력을 자극했다. 거석 위에 잠시 앉아 있던 그 까마귀는 유적의 수호자처럼 머물다 떠났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수천 년 전의 영혼이 스쳐 지나간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해 질 무렵이 되면, 붉은 태양이 거석 사이로 스며들며 풍경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물든다고 한다.

문득 토마스 하디(Thomas Hardy)의 소설 "더버빌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테스가 운명을 받아들이며 마지막 밤을 보낸 장소 바로 이곳 스톤헨지였다. 하디는 테스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는 이제 고대의 거석들 옆에 서 있었다. 테스의 몸은 마치 그 거대한 돌들처럼 묶여 있는 듯했고, 그녀의 죽음은 고대 지구의 한 켠에 스며든 비극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돌아오는 길,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허전했다. 아무것도 없는 평원 한가운데, 수천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스톤헨지는 시간을 습격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방해 없이 숨 쉴 수 있었다. 어쩌면 2025년 나의 흔적도 습기를 머금은 거석 어딘가에 먼지 한 톨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 여운을 붙잡아두려는지 스톤헨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벤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스톤헨지를 보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그 곁에 영원히 남기 위한 나의 걸음이었다.

영단어 BATH가 유래한 로만 바스. 하태길 영남대 겸임교수
영단어 BATH가 유래한 로만 바스. 하태길 영남대 겸임교수

◆로만 바스, 온천수에 담긴 시간

다음 여정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온천의 도시 바스(Bath)였다. 스톤헨지가 세워진 후 약 2,000년이 흐른 뒤, 로마 제국이 영국을 지배하게 되었고, 이때 바스에는 로마식 공중목욕탕이 들어섰다. 도시 이름 자체가 Roman Baths에서 유래했으며,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인 bath, bathroom 역시 이곳과 관련이 있다.

도심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갈수록, 이곳이 영국의 도시인지 이탈리아의 도시인지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흔히 보였던 아치, 돌기둥 그리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따뜻한 석조의 색감과 잘 어울렸다. 로만 바스에 들어서자, 고대 로마의 목욕 문화가 눈앞에 되살아났다.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서 로마인들의 기도와 치유, 그리고 휴식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욕탕 가장자리에 앉은 새들이 온천수로 목을 축이는 모습, 맑고 투명한 초록으로 물들이는 조류(algae), 그리고 햇살을 머금은 물의 반짝임은 이곳만의 특별함을 더했다. 원래는 지붕이 있었지만, 지금은 하늘 아래 노출된 채 햇살을 그대로 담고 있다.

로마 제국의 가장 화려한 시기에 건설된 카라칼라 욕장(Baths of Caracalla)이 웅장한 제국의 상징이었다면, 로만 바스는 규모는 작지만 자연 온천을 중심으로 한 실용성과 상징성이 신성함과 치유의 공간으로 기능했기에 오늘날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 자베르 경감의 마지막 장면이었던 에이번 강과 베키오 다리를 떠올리게하는 펄트니 다리의 작은 고풍스러움. 하태길 겸임교수
영화 레미제라블 자베르 경감의 마지막 장면이었던 에이번 강과 베키오 다리를 떠올리게하는 펄트니 다리의 작은 고풍스러움. 하태길 겸임교수

에이번(Avon) 강 아래쪽, 고요한 헨리에타 공원(Henrietta Park)을 지나자 펄트니 브리지(Pulteney Bridge)가 시야에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이 다리 주변은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임에도 이 장면의 촬영지로 바스가 선택된 이유는, 바로 이 도시가 수 세기의 시간을 그대로 품고 있기 때문이다.

자베르 경감이 어두운 밤, 말발굽 모양으로 소용돌이치는 에이번 강을 응시하며 첫 소절 "Who is this man?"을 노래하던 그 장면은, 현실의 강과 절묘하게 교차하며 바스에 또 하나의 서사를 흘려보냈다. 특히 펄트니 브리지는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를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다. 다리 위에는 앤티크 숍과 아기자기한 카페, 기념품 가게들이 다정히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명소로 등장한 효과를 적극 활용해 "자베르가 지나간 길목에서, 같은 시간의 감성을 담아가세요"라는 문구를 붙여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스토리텔링 마케팅(Storytelling Marketing)을 펼치고 있다.

가로등 불빛이 어스름하게 에이번 강을 비추기 시작할 무렵, 나는 펄트니 브리지의 작은 티룸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스콘과 크림티를 주문하고, 차가워진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시간과 공간이 따뜻한 온기로 모이면서 바스를 배경으로 소설 설득(Persuasion)을 집필하던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이 생각났다. 늦은 오후의 티타임은 영국의 낭만을 음미하기에 더없이 충분했다.

여행이 끝난 지금도, 바스의 온천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흐르고 있고, 스톤헨지는 과거의 침묵 속에서 묵묵히 시간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할까'라는 물음은 끝내 답을 찾지 못했지만, 그 질문 때문에 나는 또다시 떠나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어쩌면 진짜 시간여행은, 그렇게 다시 길을 나서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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