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 산업 등 이른바 첨단산업에서 '물'이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부상하고 있다.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 필요한 초순수(Ultra Pure Water)부터, 수천 대 서버를 냉각해야 하는 데이터센터의 냉방수까지, 물 없이는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 시대다. 전력과 더불어 '물'이 곧 산업의 생존 조건이 되는 구조 속에서, 낙동강이라는 국내 최대 수자원을 품은 대구·경북이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첨단산업에 필요한 '물'
반도체는 물을 가공해 만든 초순수 없이는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세한 반도체 회로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초순수는 일반적인 정수 처리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한국물기술인증원에 따르면 초순수는 물속의 이온물질 농도를 1조분의 1 이하로, 용존산소 같은 기체 농도는 10억분의 1 이하로 낮춰야 하며, 이 과정에는 고도의 여과·흡착·이온교환 기술이 동원된다. 반도체 공정이 미세화될수록 이 기준은 더 엄격해지고, 물 소비량은 더 많아진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공장을 새로 짓거나 증설할 때 '안정적인 수자원 확보'를 최우선 조건으로 고려한다. TSMC가 미국 애리조나에 진출했을 때도 가장 큰 난관은 사막 기후로 인한 물 부족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초순수 시장은 고성장 중이다. 산업연구원은 2028년까지 국내 초순수 시장 규모가 약 2조5천억원, 세계 시장은 35조5천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SK실트론이 경북 구미에서 초순수의 국산화에 성공한 것도 산업적으로는 큰 의미를 갖는다. 김영훈 한국물기술인증원장은 "국산 초순수의 품질을 검증해 국내는 물론 해외 수출까지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도체 소재 자립과 글로벌 경쟁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데이터센터 역시 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AI와 빅데이터 기술의 기반이 되는 클라우드 센터는 수천 대의 고성능 서버가 상시 가동되며, 이 열기를 식히기 위해 막대한 냉각수를 사용한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운영하는 데이터센터의 연간 물 사용량은 수백만 톤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경석 경북대 환경공학과 명예교수는 "데이터센터는 전력을 많이 쓰지만, 냉각용 물이 더 중요하다"며 "전기와 물, 두 가지가 모두 갖춰져야 첨단 인프라 유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기후위기와 맞물려 이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은 데이터센터의 물 사용량 및 냉각효율을 규제하겠다고 발표했고, 미국도 산업시설의 물 재이용 기준을 강화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물 사용에 대한 기술'이 향후 기업의 입지 선정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점에서 한국의 대비도 시급하다.
◆수도권의 한계, 대구경북의 기회
그러나 수도권은 물 부족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매년 여름이면 수도권은 반복적인 가뭄에 시달리고 있으며, 산업단지 조성도 용수 부족 때문에 제약을 받고 있다. 특히 반도체 클러스터 확장 계획에서 물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이와 달리 대구경북은 대한민국 내에서도 수자원 부존량이 풍부한 지역이다. 중심에는 낙동강이 있다. 낙동강은 대구경북을 남북으로 관통하며 산업용수 수송에 유리한 지형을 갖췄다. 안동·임하댐은 낙동강 상류에 위치해 수질이 뛰어나고 담수량도 크다. 안동댐의 총 저수량은 12억5천만톤으로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다. 이 물은 대구와 경북, 부산까지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로 공급된다.
이처럼 안정적인 수자원을 바탕으로 대구 달성 국가산단에 조성된 '국가물산업클러스터'는 기술력까지 더한 물산업 거점으로 부상 중이다. 이곳에는 물 정화·재이용 기술은 물론 초순수 생산 기술, 수질 측정·관제 기술까지 집약돼 있다. 물산업기술, 수처리 설비, 해외 수출용 장비 등을 한데 묶은 테스트베드 기능도 수행하며, 물 관련 첨단 스타트업의 요람이 되고 있다.
낙동강의 수자원, 초순수 생산 기술, 그리고 안정적인 전력까지 갖춘 대구경북은 첨단산업 유치를 위한 전략적 '허브'가 될 조건을 갖췄다는 평가다. 이를 기반으로 대구시와 경북도 역시 반도체 연관기업과 데이터센터 유치에 적극 나서는 중이다.
대구시 관계자는 "물클러스터의 연구개발특구 지정을 통해 기업 지원은 물론 연구개발을 꾸준히 진행할 것"이라며 "환경부가 추진하고 있는 물산업진흥원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지역에 물기업이 더욱 늘어나는 등 기대효과가 클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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