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賂物)은 인류 사회의 발전과 함께 발생하여 권력과 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존재하며,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 깊숙이 관여해 온 사회악이다.
뇌물의 기원은 고대 사회의 선물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에게 제물(祭物)을 바치고 소원을 빌거나, 부족의 지도자에게 선물을 주어 환심을 사던 행위가 점차 변질되었으며, 권력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체계적인 관료 제도가 생겨나면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공적인 권한을 부당하게 이용하려는 시도가 나타났고, '선물(膳物)'은 점차 '뇌물(賂物)'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중국 최초의 뇌물 관련 기사는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5년(B.C. 559)에 보인다. 춘추시대 송나라의 관료 자한(子罕)에게 어떤 이가 옥(玉)을 바치자 자한이 "나는 탐내지 않는 것을 보배로 삼고 그대는 옥을 보배로 삼는다. 따라서 그대가 이 옥을 나에게 주면 두 사람 모두 보배를 잃는 격이니, 차라리 각자 자기 보배를 지니는 편이 좋겠네"라고 말한 일이 있다.
「후한서」에는 안제(安帝) 때인 108년, 양진(楊震)이라는 청백리(淸白吏)의 미담이 전한다. 양진에게 왕밀(王密)이라는 사람이 한밤중에 황금 10근을 품고 와서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양진이 "친구인 나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친구인 나를 잘 모르니, 어째서인가?"라고 거절하니, 왕밀이 "어두운 밤중이라 아는 자가 없습니다"라며 다시 들이밀었다. 이에 양진이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四知), 어찌 아는 자가 없다고 말하는가?"라며 단호히 물리치자, 왕밀이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여기에서 '넷이 안다'는 의미의 '사지(四知)'가 청렴결백(淸廉潔白)하게 자신을 지키고, '의롭지 못한 선물을 받지 않는다'는 고사로 사용되었고, 아무리 은밀히 이루어지는 비리 행각도 완전히 은폐할 수 없다는 교훈이 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의 문헌상 가장 먼저 뇌물죄로 처형당한 사람은 누구일까? 「춘추좌씨전」에 노나라 소공(昭公) 때(B.C. 528) 진(晉)나라의 대부(大夫) 양설부(羊舌鮒)가 뇌물을 받고 그릇된 판결을 하였다가 살해된 후 다시 처형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양설부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가 "이 아이는 호랑이 눈에 돼지 주둥이를 가졌고 매처럼 두 어깨가 솟구쳤고 소의 배처럼 옆구리가 불룩하니, 산의 계곡은 채울 수 있겠지만, 이 아이의 탐욕은 만족시킬 수 없으리. 이 아이는 필시 뇌물 때문에 죽으리라"라고 했다. 뒤에 양설부는 형후(邢侯)와 옹자(雍子)의 토지 소송을 심리(審理)하면서 옹자의 딸을 뇌물로 받고 그의 손을 들어 주었다가 형후에게 살해당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시체를 가혹히 처형하였다.
조선의 학자 윤기(尹愭)는 "옛날에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릴 때 형벌로 오륜(五倫)의 가르침을 돕도록 하되 형벌을 쓰지 않는 경지에 이를 것을 기약하였다.(중략) 과오와 불행으로 지은 죄는 풀어놓아 주는 법이 있었다. 그러나 살인죄와 뇌물죄는 반드시 법대로 처벌하였다. 그러니 뇌물죄를 다스리는 법이 무너져 뇌물을 주는 풍조가 횡행하면 성인(聖人)이 다시 나와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리라"라고 하여 뇌물죄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뇌물과 선물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양자의 차이는 의도·대가성·공개성·수수자의 관계·수수자의 감정에서 분명히 갈린다. 권력자들은 뇌물을 선물인 줄 알았다고 구차히 변명하지 말고 사지(四知)를 두려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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