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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의 예술기행] 알래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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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허바드 빙하를 떠나는 크루즈 선박
알래스카 허바드 빙하를 떠나는 크루즈 선박

◆ 잭 런던의 알래스카, 찰리 채플린의 알래스카

'썰매들은 내내 삐걱거리면서 몰이꾼들의 종소리에 맞춰 끊임없이 비가(悲歌)를 불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피로에 지친 사람들과 개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눈이 잔뜩 쌓인 먼 길을 왔다. 돌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은 무스(북미산 큰 사슴) 고기가 실린 썰매는 짐이 없는 쪽으로 쏠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잡곤 했다.

어둠이 깔리고 있었으나 밤을 보낼만한 야영지는 없었다. 느른한 대기를 뚫고 조용하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라기보다 가냘프고 작은 서리 결정체라고 해야 할까? 날씨는 영하 10도 정도로 상당히 푹했다. 마이어스와 베틀스는 방한모의 귀덮개를 떼어 냈고 맬러뮤트 키드는 장갑마저 벗었다.'

소설가 잭 런던
소설가 잭 런던

수식어라곤 전혀 없는 잭 런던의 건조한 문체로 씌어진 '클론다이크 강'을 읽으며 알래스카에 반드시 가보리라 먹었던 마음이 떠올랐다. 샌프란시스코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잭 런던은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가 유콘 강 지류인 클론다이크 강에서 황금이 발견되면서 금을 캐기 위한 사람들이 몰려 든 골드러시에 합류한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노다지의 행운없이 병만 얻은 채 1년 반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1897년 갓 스무 살이었다. 다만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혹독한 대자연의 세계와 그곳에서 만난 온갖 군상들과의 경험은 이후 마흔 살에 죽을 때까지 그의 작품과 사상의 근간이 된다.

그렇게 미국 전역과 캐나다를 부랑자처럼 떠돌며 야생에 가까운 삶을 겪은 그의 야성은 생시몽, 프르동, 맑스, 트로츠키, 다윈의 진화론,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니체 등에 대한 탐독에 더해 냉혹하리만치 거칠고 건조한 시선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 개인적 소회가 있다.

그 이유는 1904년 허스트신문의 러일전쟁 특파원으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일본과 비교해 조선인에 대해 비하에 가까울 정도로 혹독하고 신랄하게 비판한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가 우리에게 너무 아프게 읽힐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혹여 그러했다면 알래스카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에 대해 일종의 당위정과 같은 진한 페이소스를 우리에게 안겨 줄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 일별을 권해드린다.

알래스카 매입에 사용했다는 수표.
알래스카 매입에 사용했다는 수표.

알래스카는 캐나다를 사이에 둔 미국의 역외(域外) 주(州)로, 1867년 크림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궁핍해진 러시아제국에게서 불과 720만 달러, 즉 1㎢당 5달러가 못 되는 헐값으로 사들인 땅이다. 당시 미국 국민들은 알래스카가 슈어드(William H. Seward, 링컨 대통령과 승계한 존슨 대통령 재임기 미국 국무장관)의 냉장고, 슈어드의 바보짓이라며 맹비난했다.

스케그웨이는 혹한의 클론다이크 금광을 향한 칠쿠트 패스(Chilkoot Pass), 즉 죽음의 길 출발지였다.
스케그웨이는 혹한의 클론다이크 금광을 향한 칠쿠트 패스(Chilkoot Pass), 즉 죽음의 길 출발지였다.

그러나 1886년 알래스카에서 금이 발견되자 경제공황으로 내몰린 전 세계의 노다지꾼들뿐만 아니라 그들 대상의 상점, 호텔, 운송업 등을 하는 미국인의 정착이 크게 촉진되어 1912년 의회의 인준을 받으면서 알래스카 준주가 설치되었다. 이후 알래스카에서 금뿐만 아니라 은, 석유 등을 비롯한 각종 자원과 금속들이 발견되어 1959년 미국의 49번째 주가 되었다. 알래스카는 면적이 151만 9,000k㎡로 미국에서 가장 큰 주이지만 인구 밀도는 그 혹독한 기후 탓으로 현재까지 가장 낮다.

알래스카 케나이 반도의 산과 호수 위 하늘을 밝히는 오로라.
알래스카 케나이 반도의 산과 호수 위 하늘을 밝히는 오로라.

세계지도를 보면 미국 알래스카는 러시아 시베리아와 베링 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가끔 우리와 DNA 유사성이 많다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신라 금관의 이미지를 품고 저 해협을 건너 잉카나 마야로 전해졌을 듯도 싶고, 중앙아시아 산맥의 생태와 기억이 이누이트(에스키모)나 알류트족에 잔재해 있을 거라 상상된다.

그 상상에 기대어 알래스카의 겨울이 시작될 9월이면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5월 여행 계획을 미뤄 알래스카의 주도(州都) 주노로 갔다. 8월에 빙하호 붕괴 홍수(GLOF)가 있었다는 외신은 봤지만 9월에야 설마 빙하가 녹았을라고.

◆주노, 스케크웨이, 케치칸 그리고 슬픈 글레이셔베이

주노는 재정러시아의 모피 집산지 싯카으로부터 주도(州都)를 옮겨 온 곳이라 했다. 금이 발견된 후 재빨리 그 일대를 구입한 캐나다 퀘벡 출신 금광 채굴업자 조 주노(Joe Juneau)의 이름을 딴 곳으로 도시는 아담했다. 성녀 테레즈 국립 성지(National Shrine of St. Thérèse)는 본토나 유럽과 달리 소박했고, 1904년 상업용으로 세워진 발렌타인 빌딩은 원형 그대로라 했다.

주노는 재정러시아의 모피 집산지 싯카로부터 주도(州都)를 옮겨 온 곳이라 한다.캐나다 퀘벡 출신 금광 채굴업자 조 주노(Joe Juneau)의 이름을 딴 도시이다.
주노는 재정러시아의 모피 집산지 싯카로부터 주도(州都)를 옮겨 온 곳이라 한다.캐나다 퀘벡 출신 금광 채굴업자 조 주노(Joe Juneau)의 이름을 딴 도시이다.

하지만 첫 발을 디뎌보려 한 멘덴홀 빙하와 너겟 폭포는 홍수로 진입할 수 없었다. 몇몇 일행이 신발을 벗고 폭포 가까이 갔었다지만 이미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을 읽고 간 나 아닌가. 그 단편 소설의 주인공은 잠시 산책 나온 설원에서 얼어 죽어갔다.

골짜기와 동굴 안에 광산을 굴착하고 살아가는 포티나이너와 그의 딸아이 클레멘타인(In a cavern, in a canyon, Excavating for a mine Lived a miner, forty-niner, And his daughter, Clementine), '넓고 넓은 바닷가에'로 시작되는 클레멘타인 노래가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이전의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의 슬픈 노래였다는 걸 두 번째 들른 도시에서 들었다.

스케그웨이는 혹한의 클론다이크 금광을 향한 칠쿠트 패스(Chilkoot Pass), 즉 죽음의 길 출발지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바라본 길에는 채플린의 영화처럼 우습고도 슬프게 반짝 반짝 우리를 현혹하는 보석가게들이 즐비했다.

눈보라가 흩날리는 비를 맞으며 우리는 기차를 탔다. 만년설을 머리에 얹은 고산준봉과 깊은 골짜기 그리고 험난한 산길에 식량과 도구를 지고 황금을 찾아 떠난 그들의 그 죽음의 길에 철도회사가 철길을 만들었고 골드러시가 끝난 뒤 쇠락한 그 길을 다시 복원해 관광기차가 다니는 거라 했다.

골드러시가 끝난 뒤 쇠락한 그 길을 다시 복원한 관광기차인 화이트패스는 북미에서 유일한 협궤열차이다.
골드러시가 끝난 뒤 쇠락한 그 길을 다시 복원한 관광기차인 화이트패스는 북미에서 유일한 협궤열차이다.

왕복 2시간 30분 남짓한 화이트패스는 북미에서 유일한 협궤열차였다. 높고 깊은 산길 아래 낭떠러지는 까마득했고 곳곳의 에머랄드빛 빙하호는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협궤열차칸을 오가는 철도원의 노란 비옷엔 빗물이 흘러내리고 협곡의 가문비나무, 잣나무 군락을 지나며 본 검게 무너진 그 시절 나무 철교들이 아찔하다.

이튿날 빙하를 보기 위해 무리를 해 예약한 크루즈 발코니선실이 무색하게도 궂은 비가 내려 글레이셔베이 빙하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고래들과 그들 등에서 뿜어올리는 물줄기와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고래가 수면으로 뛰어오르는 장면은 몇 번 볼 수 있었다.

알래스카 빙하
알래스카 빙하

녹아간다는 빙하와 수없이 바다 위를 떠도는 유빙들을 보니 마음이 어지럽고 착잡했다. 나 또한 골드러시에 부나방처럼 뛰어들고 지구를 해치는 기후변화에 한 몫을 하는 인류의 일원 아닌가. 하긴 40여 년 만에 가장 오랜 여행을 함께 하게 된 가족과도 틈이 생기는 인간일진대 2만 년 인류와 자연의 불화는 어찌 손 써볼 도리가 있겠나 싶다.

그러다가 케치칸에서의 알래스카 나뭇꾼들 럼버잭 쇼를 보며 가족과 함께 떠들며 웃고, 캐나다 빅토리아의 살이 에일 듯 추운 밤을 또 서로 감싸준다. 그렇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며 인류가 면면히 살아가는 방법인지 모른다.

'나는 먼지가 되느니 차라리 재가 되리라. 내 생명의 불꽃이 메마른 부패로 꺼지게 하느니 찬란한 빛으로 타오르게 하리라.' 이렇게 쓴 잭 런던의 어느 일면도 좋아하지만, 불화하던 가족과 '미소, 또는 눈물 한 방울이 있는 영화'란 자막으로 시작되는 채플린의 영화 'The Kid'를 함께 보며 눈물짓던 그 시절도 기억하니 말이다.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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