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백강의 한국고대사]광복 80주년 한국고대사의 뿌리를 찾아서(4)-한국과 일본은 같은 천손민족, 과거사 앙금 씻고 새역사 열어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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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일기본조약에 서명하는 장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일기본조약에 서명하는 장면.
일본 대사관 앞에 놓인 종군 위안부 소녀상.
일본 대사관 앞에 놓인 종군 위안부 소녀상.
일본의 천조대신이 천손을 일본에 내려보낼 때 주었다고 전해지는 3종 신기(神器).
일본의 천조대신이 천손을 일본에 내려보낼 때 주었다고 전해지는 3종 신기(神器).

◆태양을 숭배한 해씨(解氏)의 후손 한국인

일연의 '삼국유사' 고조선조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고 단군이 평양성에 도읍하여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을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환인, 환웅의 '환'(桓)은 밝고 환한 하늘의 태양을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고 단군은 밝달 단(檀) 임금 군(君), 우리말 밝달 임금의 한자 표기이다.

'삼국유사' 북부여조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천제(天帝)가 나라를 세워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이름을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에게 부여사에 대해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는 북부여가 제후의 나라가 아닌 천제 즉 천자의 나라란 것이고 둘째는 북부여 천자의 성명이 해모수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북부여조는 이어서 해모수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로써 성씨를 삼았다(生子名夫婁 以解爲氏)"라고 말했는데 이는 북부여 국왕의 성씨가 해씨로 계승되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해모수, 해부루의 해는 태양을 가리키는 한자 표기이다. 지금도 우리 말에서는 태양을 가리켜 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예컨대 해가 뜬다. 해가 저문다. 해가 길다. 해가 짧다 등이 그것이다.

환인 환웅의 환, 밝달 임금의 단군, 북부여 해모수, 해부루의 해는 글자 표기는 각기 다르지만 모두 하늘의 밝은 태양을 상징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고구려를 창업한 추모왕이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다(天帝之子 母河伯女郞)"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삼국유사' 고구려조에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이 북부여 천제 해모수와 해백의 따님 유화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조에는 주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주목할만한 내용이 보인다. "주몽은 추몽이라고도 하는 데 단군의 아들이다(朱蒙一作鄒蒙 壇君之子)."

이 기록은 북부여의 성씨가 해씨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도 본래는 고주몽이 아니라 해주몽이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인데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면 해모수를 비롯한 북부여 단군의 성씨가 해씨임은 물론 고구려 주몽도 고주몽이 아닌 해주몽이었음이 자명하다.

광개토태왕 비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삼국유사'의 왕력과 북부여조 등의 기록을 종합 검토해보면 고조선의 역대 단군, 북부여의 천제, 고구려의 주몽 등이 모두 하늘의 태양을 숭배한 해씨였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신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란 명칭 가운데는 태양숭배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혁거세는 밝거시, 우리말 밝은 이, 즉 밝달 임금의 한자표기이다.

태양을 가리키는 순수한 우리말이 해이고 이를 한자로 음차표기한 것이 해(解)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의 왕들이 성씨를 해씨 또는 밝씨로 한데서 우리 민족은 곰이 아닌 밝고 환한 하늘의 태양 즉 해를 숭배한 하늘의 자손, 천손민족임이 확실하다.

◆일본의 천손 강림 신화

일본에서는 천조대신을 일본 천황의 시조로 받든다. 천조대신의 신화는 일본의 상고사를 다룬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실려 있다.

천조대신은 천손에게 세 가지 신기(神器)를 주면서 세세 대대로 일본을 통치할 것을 약정했다. 세종류의 신기는 천총운검(天叢雲劍), 팔척경구옥(八尺琼句玉), 팔지경(八咫鏡)을 말한다.

천조대신이 천손에게 주었다는 3종의 신기는 2천년 동안 일본 황실의 보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민중들의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천조대신이 자신의 손자를 지금의 일본 땅으로 내려보내 관리하도록 했다는 점은 환인이 아들 환웅을 태백산으로 내려보내 신시를 세웠다는 내용과 유사하다.

천손이 일본에 강림할 때 천조대신이 칼, 구슬, 거울 3종의 신기를 주었다는 것은 환인이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했다는 내용과 닮았다.

일본 역사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들이 한국인과 동일한 천손민족임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서기' 제2권 신대(神代)는 태양신 천조대신의 자손인 천손의 탄생 신화를 기록한 것이다. "천손을 받들어 도우라(奉助天孫)", "천손의 제사를 받으리라(爲天孫所祭)"는 등의 내용은 그것을 잘 설명한다.

815년 천황의 명에 의하여 편찬되었다는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국가를 천손을 내려보내 창업했다(國家 降天孫而創業)"라고 말했다.

신무천황조에는 "나의 조상은 천신이고 어머니는 해신이다(吾祖則天神 母則海神)"라고 하였다. 또한 나라를 평정하는 검을 내려줄테니 "이를 가져다가 천손에게 드려야 한다(宜取而獻之天孫)"라는 기록도 보인다.

일본의 천조대신은 하늘의 태양 광명이 비치는 신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시조 이름에서 일본인은 하늘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천조대신은 자신의 손자를 지금의 일본국에 파견하여 관리하도록 함으로써 그 뒤에 천조대신의 자손들이 한결같이 일본을 통치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일본의 천황은 천조대신의 만세 일계의 천손이라는 전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같은 천손민족, 과거사 앙금 씻고 새 역사 열어가야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줄곧 한국의 지배를 받는 입장에 있었던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 유럽의 근대자본주의를 도입하면서 과학기술에서 한국을 앞서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한 뒤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고 식민지배를 본격화했다.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잇달아 투하되자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한국도 35년만에 광복을 맞았다.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양국은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뿌리 깊은 대일 반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한일관계는 과거사 논쟁, 독도 영유권 분쟁,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많은 갈등 요인을 안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교빙고(交聘考)에서 한, 일의 초기 외교와 관련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일본과 활발한 외교가 이루어졌다. "백제의 650년 역사상에서 왜병이 나타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百濟六百五十年 倭兵 史無一見焉)"라는 기록에 의해서 백제와 일본은 특히 굳건한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며 상호 침략이나 무력도발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중국과의 소통은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우리나라를 경유해서 이루어졌다. "진, 송을 거치면서 다 사신을 보냈는데 그 행차는 반드시 우리나라를 경유했다(歷晉宋 皆遣使 而其行 必由我國)"라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러면 왜국이 언제부터 독자적으로 중국과 외교 관계를 갖게 되었는가. "양무제 시대에 이르러 왜국의 흠명천황이 비로소 중국과 직접 교류하였고 드디어 다시는 우리나라를 통한 사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至梁武帝時 倭欽明天皇 始通江南 遂不復由我國行焉)." 이는 일본이 남북조시대 까지 백제를 통해 중국과 간접적으로 교류하다가 흠명천황시대에 직접적인 외교 관계가 수립된 것을 말해준다.

'해동제국기문'(海東諸國記聞)에 나오는 다음 문장은 일본의 문화를 창조하는데 백제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잘 보여준다. "왜국에는 처음에 문헌이 없었다. 백제 고이왕 51년에 이르러 비로소 백제로부터 중국 서적을 얻었다. 또한 의복 제도도 없었다. 백제왕이 재봉하는 여공들을 보내면서 비로소 복색이 있게 되었다(倭初無文獻 至百濟古爾王五十一年 始從百濟得中國書籍 又無衣制 百濟王送裁縫女工 始有服色云)."

한국은 일본과 수천년 동안 같은 천손민족의 나라로서 특히 문화를 전해준 문화선진국으로서의 지위와 긍지를 유지해 왔다.

일본과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는가.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 고종 때 왜구가 우리 연해를 침략한 기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일본과 고려가 사이가 나빠지게 된 계기는 원나라와 일본의 전쟁에서 고려가 원나라 편에서 일본을 공격한 뒤로부터이다.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서 일본에 대한 군사침략을 시도하였다. 당시 쿠빌라이 칸은 부마국(駙馬國)인 고려 충렬왕에게 출정을 강요하여 원, 고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했는데 일본군의 완강한 방어와 도중에 만난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원나라와 손잡고 일본을 공격한 것에 앙심을 품은 일본은 그 뒤에 한동안 고려와 절교를 하기도 하였다. 한양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침략과 약탈을 계속하였고 임진왜란의 발발로 이어졌으며 한양조선 말 1910년에는 국권침탈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에서 한국과 일본은 형제의 나라로서 깊은 우의를 이어왔으며 서로 관계가 악화되어 가깝고도 먼 나라가 된 것은 단지 500년~600년에 불과하다.

한국은 올해로 광복 80주년을 맞는다. 광복한 지도 반세기를 훌쩍 넘어 100년을 향해 간다. 우리가 언제까지 과거사에 발목 잡혀 있을 수만은 없다. 이제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우선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인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부터 치우고 그자리에 차라리 자랑스러운 왕인박사의 동상을 세우자.

일본열도에 널리 퍼져 있는 약 2천년 전 야요이(彌生)문화는 고조선, 부여로부터 넘어간 것이 확실하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왜와의 교역을 통하여 백제에 문화를 전파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백제의 학자 아직기(阿直岐)는 일본에 건너가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왕인박사는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하여 유학을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이 밖에 도공, 와공, 화공, 철공 등의 기술자는 물론 심지어는 장을 담그는 기술, 옷을 만드는 재봉기술까지도 일본에 전해주었다.

존 카터 코벨은 "일본 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그들에게 남아나는 것은 거의 없다. 적어도 서기 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그러하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역사문화적으로 형의 입장에 있다. 최근 경제적으로도 일본을 앞질렀다. 이제는 같은 천손민족으로서 과거사의 앙금을 씻고, 우리가 형님의 아량을 발휘하여 일본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자세로 나아갈 시기가 되었다고 본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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