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정치는 현대 정치에서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됐다. 팬덤정치(Fandom Politics)는 특정 정치인을 연예인이나 아이돌처럼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현상이다.
과거의 단순한 지지자를 넘어 소셜 미디어(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홍보 콘텐츠를 제작하고, 후원금을 모으거나 투표 독려 캠페인을 벌이는 등 능동적이고 조직적으로 활동한다.
강력한 지지층은 정치인이 기득권이나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 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강해져, 타협과 협치라는 정치 본연의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 또한 소수의 열성적인 목소리가 전체 민심처럼 비춰지면서, 상당수 온건한 중도층의 의견이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배제될 수도 있다.
2000년 결성된 노사모는 한국 정치사에서 '팬덤'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초로 꼽힌다. 같은해 총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서울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자, 이에 감동한 시민들이 '희망돼지 저금통' 모금, '노란 손수건' 캠페인 등을 펼치며 자발적으로 결성했다. 이를 계기로 노무현을 2002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노사모가 진보 진영의 상징이라면, 박근혜를 지지한 박사모는 보수 진영에서 정치인 개인에 대한 강력한 충성도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다.
그 역사가 제법 쌓이고 유튜브를 비롯해 더욱 다채로워진 미디어들이 뒤를 받쳐주니 바야흐로 팬덤정치 2.0 시대다.
◆박사모 '태극기'와 문재인 '촛불' 갈등
박사모와 문재인 팬덤의 갈등은 한국 사회의 진영 논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이다. 특히 2016~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을 거치며 이들은 단순한 지지 모임을 넘어 오프라인 광장과 온라인 여론장에서 직접 충돌하는 양상을 띠게 됐다.
탄핵 정국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 지지층이 핵심축이었던 '촛불 집회'는 '박근혜 구속'을, 박사모가 주축이 된 '태극기 집회'는 '탄핵 무효'를 외치며 매주 주말 서울 도심을 반으로 나눠 점령했다. 이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팬덤정치'와 '진영 갈등'의 원형이 되고 있다.
◆요즘 정치팬덤은 아이돌 '총공' 닮은 온라인 전투가 일상
지난해 11월 27일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와 홍준표 전 대구시장 간 온라인 설전을 다룬 매일신문 기사(한동훈, 홍준표 '한덕수 비판'에 '한덕수와 단일화 약속 문자' 공개하며 "이제와서?")는 당일 출고된 매일신문 기사들 중 두번째로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을 정도로 화제였다.
유입 경로 데이터를 살펴보니 두 정치팬덤이 충돌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동훈 전 대표 팬카페인 '위드후니' 및 소통 플랫폼 '한컷'과 홍준표 전 시장 소통 플랫폼 '청년의꿈'에 기사 링크가 공유된 게 확인됐다.
승리한 쪽은 명확해 보였다. 기사에는 총 451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홍준표 전 시장을 비판하면서 한동훈 전 대표를 지지한 내용들이 공감순 상위권을 차지, 아이돌 팬덤의 '총공'(총공격의 준말, 좋아하는 아이돌을 응원하고자 대규모 인원이 일시에 접속해 온라인 게시판을 도배하거나 포털 실검 순위를 높이는 등의 집단행동)과 유사한 흔적을 남기며 정치팬덤과의 연결고리를 짙게 내비쳤다. 총공은 정치팬덤에서 '화력지원' '댓글정화' 등으로도 표현한다.
◆팬클럽 규모는 정치인 체급 바로미터?
지난해 12월 6일엔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의 팬카페인 '만사혁통'이 개설돼 시선을 모았는데, 함께 주목 받은 게 일종의 심사라고 할 수 있는 가입질문이었다. '평소 한동훈을 부르는 호칭은?'이라는 질문은 정치팬덤의 관점에서 따져보면 "상대(라이벌) 정치인에 대해 속마음을 표현하고 험담을 함께하는 순간, 한 편이라는 것을 느낀다"고 한 이재명 대통령 지지자의 인터뷰 발언(장현석 극동대 교수 2023년 저 'K팝 팬덤의 놀이에서 정치팬덤의 길을 찾다')에 딱 들어맞는다.
이어 올 1월 13일 국민의힘 윤리위가 한동훈 전 대표를 제명하고 1월 15일 장동혁 대표가 쌍특검 요구 단식을 시작한 직후였던 1월 17일 만사혁통 회원 수는 1만명을 돌파했다.
◆盧·朴·文 '메이드 바이 팬덤' 사례 이어지자 정치팬덤 붐
팬덤정치에 대한 관심은 지난 2022년 10월 윤석열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가 '팬덤과 민주주의 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을 정도로 커졌다. 특위는 "정치 분열과 갈등 해소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통합의 관점에서 팬덤정치 이슈를 연구한다"고 밝혔는데, 지난해 8월에 '건강한 정치팬덤 문화 조성' 등 바른생활 교과서 수준의 제언을 내놓긴 했다.
여기서 언급된 정치 분열과 갈등은 한국 팬덤정치의 시초 노사모는 원치 않은 현상이었다. 노사모가 만들어진 주요 계기가 2000년 16대 총선 때 부산에서 허태열 한나라당 후보가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에게 던진 지역감정 자극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노무현과 함께 우리나라의 왜곡된 지역감정의 극복에 동참한다'가 노사모 회칙 첫 줄이다.
이어 2004년부터 두 정치팬덤 사례가 두각을 드러냈다. 박사모와 문사모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18대 대선즈음 선관위 통계에 따르면 박사모를 비롯한 박근혜 정치팬덤 총 회원 수는 다른 대선 주자들과 비교해 가장 많은 20만명에 달했다. 문사모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회원이 크게 늘어났고 이에 더해 '젠틀재인' 등 크고작은 팬덤이 '문팬'으로 통합, 문재인 대통령의 19대 대선 당선에 힘을 실었다.
두 집단 또한 대통령 배출이라는 성과를 내는 동안 우리나라 정치팬덤은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난립 경향을 보였다. 이재명 '손가혁'(손가락혁명군), 안희정 '아나요'(아름다운 세상을 나눠요), 안철수 '안사모', 유승민 '유심초', 황교안 '황대만'(황교안 통일 대통령 만들기), 정봉주 '미권스'(미래권력들), 반기문 '반사모', 손학규 '학규마을', 김문수 '문수사랑', 정몽준 'MJ21' 등의 정치팬덤이 2010년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상당수는 사라졌다.
◆'팬덤 없인 작동 불가' 대한민국 정치판
정치팬덤은 2024년 22대 총선과 비상계엄을 계기로 크게 변신했다.
우선 주목할 사건은 조국혁신당의 창당 및 원내 입성(비례대표 12석)이었다. 2019년부터 시작된 '조국사태'는 '조국수호'라는 정치팬덤과 '조국아웃'이라는 안티테제(반대) 세력 간 대결을 만들었고, 이어 팬덤이 사실상 정당으로 변모한 특이 사례로 평가된다. 과거 노사모가 창당에 영향을 준 열린우리당 사례와 비교, 구심점이 된 인물로 보나 그의 이름이 차용된 셈인 당명으로 보나 팬덤 성향이 더 짙다는 분석이다.
대통령 배출 정치팬덤 계보 역시 이어졌다. 이재명 대통령의 3차례 대권 도전 과정에서 와해된 손가혁과 새로 출범한 '재명이네마을'을 묶어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재명 대통령 강성 지지층으로 유명한 '개딸'(개혁의 딸)도 등장했다.
재명이네마을은 정치인 팬카페 회원 수로 따져도 국내 1위(현재 20만명) 팬덤이다. 2위(9만명)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의 2020년 검찰 좌천 시기 만들어진 팬카페 위드후니다. 영부인이 되기를 바라는 팬덤이 결성돼 부군을 지지한 것도 전에 없던 사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기였던 2021년 만들어진 부인 김건희 씨 팬카페 '건사랑'(8만명)은 계엄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윤석열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올어게인'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 중이다.
팬카페로만 팬덤의 위세를 따지긴 힘들다. 지지자들이 이용하는 미디어 종류가 워낙 많아져서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의 경우 팬카페 '미래권력 준스톤'이 있기는 하지만 회원 수가 1만명이 채 안 된다. 대신 지지자들이 일명 '펨코'(FM코리아) 등 온라인 커뮤니티 정치 게시판에서 왕성하게 활동한다.
'떳다방' 구태도 여전하다. 윤석열 대통령 파면에 따른 조기대선 시기에 뜬 한덕수 권한대행을 지지하는 팬카페 '덕수왔수다'가 개설돼 네티즌들이 운집했으나, 그가 내란 재판을 받고 있는 현재 회원 수는 5명이다.
◆팬덤정치 강화시키는 '큰손' 유튜브
이렇게 정치팬덤이 팬덤정치를 구축하면, 팬덤정치는 다시 팬덤, 즉 지지층을 관리하고 확장하는 것에 집중한다. 주요 매개체가 바로 유튜브다. 기계적으로라도 균형에 좀 신경 쓰는 전통 미디어와 비교해 진영이 확실히 갈리는 특징을 초기부터 보였다.
2016년부터 시작된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라디오 방송이었지만 유튜브 생중계가 파급력을 냈고, 이는 현재 진보 진영에서 구독자가 두번째로 많은 유튜브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231만명)으로 승계됐다. 진보 진영 구독자 톱 유튜브는 '매불쇼'(287만명)다. 두 유튜브는 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 등 범여권 정치인들이 팬덤에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이다. 선거 공천 시기엔 더하다.
보수 진영 유튜브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하나 둘 등장하더니 지금은 '진성호방송'(186만명)과 '신의한수'(159만명)를 필두로 하는 구독자 100만명 이상 몇 곳을 비롯해 수십만 구독자 규모 유튜브도 여럿 운영되고 있다.
이어 양 진영 대형 유튜브에서 생산한 긴 분량 콘텐츠가 일명 '바이럴(여론 확산) 유튜버'들에 의해 짧은 분량의 '쇼츠'로 쪼개져 재확산하는 게 요즘 정치 유튜브 생태계다.
정치인이 직접 유튜브를 개설해 자기 팬덤과 만나는 것도 대세다. 22대 국회의원 298명 중 95%(286명)가 자기 유튜브를 운영 중이다. 현직 국회의원 중 유튜브 구독자가 가장 많은 사례는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정청래TV(69만명)다. 이재명TV(184만명)가 대통령 유튜브 사례로 넘어가면서 차지한 1위다.
정치인이 운영하는 유튜브는 최전선 참호, 지지자가 운영하는 팬카페는 배후 기지다. 유튜브는 가령 상대 팬덤이 좌표를 찍어 '싫어요'와 '차단'을 클릭하거나 유튜브 계정 정지 또는 삭제를 노린 '신고'를 하는 '비공감 테러'를 당할 수 있지만, 팬카페는 아군끼리만 모여 작당모의를 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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