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예술을 멈추지 못했다. 6·25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무너진 예술인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대구 향촌동 골목에 모였다. 포성이 가까웠던 시기에도 이 좁은 골목에서는 시가 쓰였고, 음악이 울렸으며, 무대가 올랐다. 피란지 대구에서 예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향촌동 골목에 남은 흔적을 따라가 본다.
◆ 피란지 향촌동에 모인 문인들
경상감영공원 입구에서 쭉 뻗은 골목으로 발을 구르면, 2층 높이의 상가 건물이 늘어진 향촌동에 가닿는다. 6.25 전쟁 전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이 좁은 골목은 예술이 간신히 숨을 붙일 수 있던 공간이었다. 줄지어 있는 막걸리집, 다방을 오가며 작품을 구상했고, 술집과 여관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듯 작품 이야기를 나눴다.
시대 상황과 맞물려, 문인들은 종군활동과 창작을 병행했다. 시인 구상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원에서 대구로 피란해 육군종군작가단 부단장을 맡았다. 전쟁을 기록하는 임무와, 시를 쓰는 삶이 동시에 그의 어깨 위에 놓였다.
구상이 자주 찾던 곳은 골목 한가운데 자리한 '대지바'(북성로 104-11)였다. 바로 옆이었던 '화월여관'은 그가 머물던 숙소였다. 피란 예술인들은 이 일대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전쟁 속에서도 써낼 수 있는 언어를 고민했다. 대지바가 있던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다. 내부는 당시 예술 활동의 흔적을 되짚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구상과 함께 종군 작가로 활동한 이들은 당대 문단의 중심인물들이었다. '나그네' 박목월 시인, 소설 '역마'의 김동리 등 유명 예술인들이 구상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전쟁 기록을 남기거나 애국심을 진작시킬 수 있는 작품, 혹은 전쟁이 벌어지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향을 담은 글들이 태어났다.
◆ 포성 사이로 흐른 음악
향촌동에서는 문학만큼이나 음악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녹향 음악감상실(서성로 14길 100)은 그 상징적인 공간이다. 녹향은 광복 직후인 1946년, 이창수 선생이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을 모아 만든 예육회에서 출발했다. 축음기 한 대와 레코드 500장.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음악을 향한 갈증은 그보다 컸다. 이곳은 이내 예술인들이 모여드는 사랑방이 됐고, 시인 양명문은 이곳에서 시 '명태'를 쓰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장소는 바뀌었지만, 녹향의 이름은 남아 있다. 향촌문화관 지하에 마련된 공간에는 스피커와 안락한 의자가 놓여 있다. 관람객들은 신청곡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음악을 듣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귀를 기울이는 방문객의 마음가짐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51년 문을 연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경상감영 1길 62-9)는 전쟁 속에서도 음악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전선이 현풍 앞까지 내려온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고전 음악을 듣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몸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작은 난로 하나뿐이었지만, 좁은 방 안에는 피아노 선율이 가득 찼다. 이 풍경을 본 외신은 르네상스를 "폐허 속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리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향촌문화관 인근 단층 주택건물의 벽에 붙은 터 표식만이 남아있다.
향촌동에는 음반 제작의 중심 역할을 한 오리엔트레코드사도 있었다. 악기점을 운영하던 이병주가 설립한 이 회사는, 전쟁으로 서울의 레코드사들이 무너진 사이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전쟁을 피해 내려온 작곡가와 작사가들이 이곳에 모였다.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90장의 음반과 170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전우야 잘 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노래는 전쟁으로 상처 입은 민중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 피란지에서 다시 오른 막
일제강점기 '키네마구락부'로 시작해, 국립 중앙극장의 칭호까지 얻게된 한일극장도 향촌동 인근에서 태동했다. 한일극장(당시 문화극장)은 연극인들의 보금자리로 활용됐다. 1.4 후퇴 당시 대구로 내려온 극단 '신협'이 대표적이다.
무대에는 우리 고유의 서사를 담은 창작극부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까지 올랐다. '자명고', '마의태자', '맹진사댁 경사'가 상연됐고, '햄릿'은 유독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전쟁 통에도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에 대한 선호는 사라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앞다투어 한일극장을 찾았다. 특히 햄릿은 매번 관객들이 만석을 이룰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1953년 서울의 국립극장이 한일극장으로 이전하며, 극장의 위상은 더욱 높아진다.
흔히 대구는 전쟁의 피해를 비껴간 '무풍지대'로 기억된다. 그러나 전선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대구는 결코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예술인들이 모여든 향촌동 골목에서는 문학과 음악, 연극이 새로이 피어났다. 전쟁 속에서 탄생한 이 문화적 에너지는 피란지의 임시 산물이 아니라, 오늘날 대구 문화의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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