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신라의 고대국가 완성과 통일추진 정책들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5~6세기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수입 목걸이
5~6세기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수입 목걸이

난세의 소용돌이 가운데 위치한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첫째, 지속되는 남북 사이의 군사적인 충돌을 해소하고, 가능한 한 빨리 통일을 실현해야 한다. 둘째, 분단과 전쟁 발발에 직접 관여한 중국·일본·러시아 등 국경을 접한 강대국들, 그리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함께 만들어내는 상황과 다양한 압력에 대응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치력을 더 강화하고, 경제력을 더 키우며, 치밀하고 효율적인 외교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남한 내부의 갈등, 특히 사상 갈등까지 해소하고,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통일 이념 또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사상과 신앙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정책과 전략을 수립하고 집행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역사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다. '신라'와 '김이사부'이다.

◆분지 국가의 한계와 구조적 문제
신라는 경상도 일대를 기반으로 삼은 진한 12국 가운데서 경주 분지를 중심으로 한 소국으로 출발했다. 형산강 유역의 비교적 비옥한 평야를 기반으로 성장했으나, 그 공간은 제한적이었고,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경주 분지의 환경 수용력은 한계가 있었다. '환경 수용력(Carrying Capacity)'이란 특정한 환경이 지속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 최대 인구와 생산 규모를 뜻한다. 농업 생산력, 물, 지하자원 등, 거주 면적, 교통망의 효율성 등이 이를 결정한다. 하지만 사로국은 부단하게 통일 정책을 추진하여 5세기 말에는 경상북도 일대를 하나의 통일된 체제로 만든다. 내부의 통일에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농지가 확장되고, 인구가 팽창했으며,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종류와 양도 확대됐다. 또한 통일시킨 소국들의 왕족들과 호족세력들을 귀족세력으로 편입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자체의 영토와 자원들로는 장기적인 성장과 국가로서의 발전을 감당하기 어려운 단계에 접근했다. 거구나 국제 외교 질서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무역 체제에는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태의 신라가 국가의 질적인 성장을 원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치적으로 통합된 내부 질서를 안정시키면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정책이다. 또 다른 하나는 외부 공간의 확장, 즉 신라를 압박해온 국가들과 본격적으로 경쟁체제에 돌입해서 영토를 넓히거나 국가를 운영하는 데 유리한 환경수용력을 확장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 두 요소는 상호 연동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하지만 우선 순위와 주도적인 위치의 차이는 있었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후자에 우위를 두는 방식을 선택했다. 즉 가야 백제 그리고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고구려 등 외부세력과 경쟁을 하면서 양적인 팽창에 비중을 두는 정책이었다.

금관총에서 발견된 금제 허리띠
금관총에서 발견된 금제 허리띠

◆지증왕의 정책과 김이사부의 등장
서기 500년, 지증 마립간이 64세라는 나이로 22대 임금이 됐다. 그는 곧 '마리' 즉 '으뜸 되는 '간(칸)'이라는 고유 명칭을 버리고, 중국식인 '왕'으로 고쳤다. 나라 이름도 '사로' '사라' '신라' 등에서 이제는 '신라'라고 고정시켰다.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 즉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그물처럼 사방으로 펼쳐진다'에서 따온 용어이다.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내부 질서 정비와 외교적 위상 강화를 동시에 노린 조치로서 국가이념이 반영된 용어이다. 명실공히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임을 국내외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후속조치로서 지방에 주와 군 현을 정해서 지방통치를 일원화시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경(牛耕)을 장려했다. 분지의 한계를 인식하고, 농업 생산성을 증대하여 환경 수용력을 확대시키는 정책이었다.

단양 적성에서 발견된 신라 적성비.
단양 적성에서 발견된 신라 적성비. '이사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지증왕은 내부 정비를 일단락한 후에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 때 20대 초의 젊은 왕족인 김이사부가 역사에 등장해서 70대까지 무려 50여년 동안 신라의 강대국화와 삼국통일 전초작업을 완성했다. 그가 주도해서 추진한 영토확장 등 주요한 정책들을 분석하면 몇 가지 특성들이 나타난다. 첫째는 사업들이 일회성이나 산발적인 것들이 아니었고, 시간적으로 연속성을 띄었다. 둘째는 점령 지역의 특성에 '해양'과 '수로'라는 물류망의 거점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고, 공간적으로 유기적인 체제를 완성시키는 과정이었다. 즉 의도적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국가발전 기획 즉 큰 청사진을 의식하면서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50여년 동안에 한반도 중부 이남의 전략적 위치인 5개의 항구 지역과 연결된 교통망을 확보했는데, 이는 일종의 '해륙국가'의 형태에 근접했다.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그 모델은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이 추진한 '동아지중해 중핵국가'로 보여진다.

단양군 영춘면 신라 온달산성 내부
단양군 영춘면 신라 온달산성 내부

512년, 실직주(삼척)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되었던 김이사부는 해양 작전을 전개했다. 수군 선단을 이끌고 동해 중부의 항구(삼척 또는 강릉)를 출항하여 160여㎞를 항해하여 우산국(울릉도)이라는 해양 소국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어업 자원과 동해 항로의 거점을 확보하여 경주 분지와 경상북도 내륙 중심의 농업 경제에 해양자원을 보완시켰다. 분지의 연맹체 국가에서 해양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고대국가로 전환한 것이다. 이 작전은 오랫동안 신라의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울진·삼척·강릉 등 동해 중부 항구와 횡단 항로를 활용했던 고구려를 북쪽으로 후퇴시켰다. 이후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을 시도할 수 있었고, 일본열도로 더 쉽게 진출할수 있었다.

온달산성 내부와 남한강
온달산성 내부와 남한강

◆법흥왕의 불교 공인과 신라의 영토 팽창
뒤를 이은 법흥왕은 517년에 병부를 설치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군사 체제를 정비했다. 이어 비록 고구려의 힘을 빌렸지만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522년에는 가야와 혼인 동맹을 맺었다. 외교적인 생존 전략들이었다. 527년에 조카인 '박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다. 이는 외래종교의 수용을 넘어 귀족 세력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고도의 이념적 장치였다. 다양한 종류의 내부 분열은 사회적 수용력을 약화시키므로 불교라는 통합 이념으로 사회적, 사상적인 통일을 이루하는 시도였다. 다시 529년에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에 터를 둔 금관가야와 바다를 건너온 왜를 공격했고, 532년에 금관가야를 멸망시켰다. 이제 신라는 남해안 일대의 물류망과 해양력을 흡수해 본격적인 해양세력이 됬으며, 일본열도와 안정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교두보까지 확보해 국제적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신라가 최종적으로 장악한 대중 교통항구인 화성의 당성 성벽
신라가 최종적으로 장악한 대중 교통항구인 화성의 당성 성벽

540년에 진흥왕이 임금이 되면서 신라사회는 비약적으로 발전을 한다. 하지만 7세에 즉위했으므로 김이사부와 재혼을 했던 어머니가 섭정을 했다. 김이사부는 병부령으로 승진했으며, 각간이면서 상대등으로서 신라의 권력을 장악했다. 체계적으로 약소국인 신라를 강대국의 반열에 올리고, 삼국을 통일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그 무렵 유라시아 세계의 질서는 재편되는 중이었고, 중국 지역은 남북조 시대라는 대분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반면에 광대한 초원을 통일한 돌궐 부족은 552년에 제국으로 성장하여 중국 지역을 수시로 공격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고구려는 신라와의 대결이 전념할 수 없었다. 신라는 548년에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공격을 격퇴했고, 550년에는 충청 지역을 차지했다. 이어 고구려가 요동전선(백암성)에서 돌궐의 공격을 받을 때 한강 상류인 죽령(소백산맥) 이북의 10개 군을 탈취했다. 단양군 적성면의 돌비에는 김이사부를 비롯하여 이 때 공훈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어 점령한 충주는 남한강이라는 최고의 수로망, 낙동강과 단거리로 연결되는 육로망이 교차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이고, 한반도 내륙 최고의 항구도시였다. 고구려는 이 곳에 '중원경'을 설치했고, 유명한 '충주 고구려비'를 세웠을 정도였다. 이후에 신라는 남해 동부해양과 동해 중부 해양을 유기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윤명철, <해양활동과 국제질서의 이해>).

울릉도 남서동 고분군. 신라계양식을 주조로 만들어졌다.
울릉도 남서동 고분군. 신라계양식을 주조로 만들어졌다.

◆해양세력으로 성장과 대중국 교류
신라 사회는 연속적으로 승리했고, 진흥왕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개국(開國)'이라는 특별한 연호를 발표하여 국가의 지표를 국내외에 선언했다. 553년에는 백제와 맺은 혼인동맹을 깨고, 기습공격을 감행해 서울을 포함한 한강 하류를 빼앗아 '신주'를 설치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제와 대가야는 동맹을 맺고 신라를 협공했으나, 백제의 성왕을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에서 전사시켰다. 신라는 계속해서 정복활동을 시도했다. 555년에 경남의 창녕과 함안 등에 관청을 설치해서 서부 낙동강의 하류의 수로망, 동부 남해의 물류망과 해양능력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이어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비열홀(안변)을 설치했다. 또 서울과 광주 지역에 북한산주를 설치했고, 남양만을 탈취했다. 이로서 중국 지역과 해양교류를 펼치면서 국제질서에 진입했고, 서해 수군을 육성할 수 있었다. 마침내 562년에 가야를 완전하게 붕괴시켰다. 그리고 김이사부가 죽은 후인 566년에 진흥왕은 통일의지를 담은 황룡사를 완공했고, 북진을 계속해서 함경남도 해안까지 진출했고, 황초령비, 마운령비를 세웠다.

신라가 차지한 남한강가의 항구도시인 충주의 7층 중앙석탑(통일신라시대 건축)
신라가 차지한 남한강가의 항구도시인 충주의 7층 중앙석탑(통일신라시대 건축)
고구려가 5세기 초에 중원경인 충주시에 세운
고구려가 5세기 초에 중원경인 충주시에 세운 '충주 고구려비'

약소국이 빠른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려면 군사력과 경제력이 급속하게 팽창해야 하며, 내부의 통일은 필수적이고, 인재를 공급하는 시스템이 양호해야 한다. 현명하거나 야심이 큰 지도자들은 이런 일을 추진했지만, 대부분은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줄기찬 정복 작전과 피아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 외교활동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뿐 만 아니라 진흥왕 때 부터는 유학 승려를 비롯한 신라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동일한 하나의 목표를 갖고 유기적으로 활동했다. 정통성 확립과 자의식 고양을 목표로 <국사>라는 역사책을 편찬했다. 또한 이미 시대정신으로 공감한 삼국의 통일을 선언하고, 그 의지와 논리, 기술력을 집약시킨 황룡사를 건축했다. 또한 시대상황에 적합한 인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풍류라는 사상과 '화랑'이라는 독특하고, 심원한 교육제도를 추진했다. 선진국으로 도약하지만, 불안정하고, 특히 미 중간의 충돌로 인하여 통일은 커녕 어쩌면 나라의 생존조차 위협받을수 있는 한민족에게 신라의 국가발전 정책과 김이사부라는 인물은 현실적이고 검증을 받은 모델이다.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신라가 점령한 한강가인 아차산의 산성( 백제 초축, 후에 고구려, 신라가 보죽함).
신라가 점령한 한강가인 아차산의 산성( 백제 초축, 후에 고구려, 신라가 보죽함).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이정현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은 22일 현직의 자동 공천을 부정하며, 공정한 경쟁을 위한 공천 기준을 강조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를 당을 ...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 변화로 인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상호관세 부과를 위법으로 판결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글로벌 관세...
정치 유튜버 전한길이 그룹 슈퍼주니어 최시원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3·1절 기념 자유음악회'에 초청했으나, 가수 태진아 측은 출연 사실을 ...
태국의 유명 사찰 주지 스님 A씨가 여러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논란에 휘말렸다. 최근 소셜 미디어에 유포된 영상에는 A씨의 아내가 다른 ..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