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배달겨레니, 단일민족이니 단군의 자손이라는 수식어를 마치 신성불가침의 성역처럼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척박한 반도의 역사 속에서 외세의 침략을 견뎌내야 했던 우리에게 혈통적 순혈주의는 어쩌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가장 단단한 심리적 갑옷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냉정하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한국인은 순수 혈통인가? 우리가 믿어온 이 사고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과 어느 정도 합치되는가?
역사의 이끼와 먼지를 털어내고 내면을 들여다보면 조선의 풍경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폐쇄와 은둔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낯선 언어를 쓰고, 피부색이 다르며, 먼 바다 너머의 신을 믿었던 수많은 이방인이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 왕의 곁을 지키는 근위병으로, 때로는 나라를 구하는 장수로, 또 때로는 광산업자와 의사, 배 만드는 기술자, 짐승 도축업자. 외교 전문가로 우리들의 다정한 조상으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
◆먼 바다의 물결이 조선의 해안에 닿을 때
흔히 고려는 개방적이었으나 조선은 해금(海禁)과 공도(空島) 정책으로 일관한 극단적 폐쇄 사회였다고 기억된다. 하지만 조선 초기의 기록은 우리의 선입견을 여실히 깨뜨린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기틀을 세우던 시절, 멀리 태국(섬라곡국)에서 온 사신 장사도(張思道)는 낯선 풍물과 함께 원주민들을 데려와 조선 조정에 바쳤다.
놀라운 것은 이들을 대하는 조선의 태도였다. 태조는 이방인들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왕실 근위대에 배속시켰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의 심장부를 지키는 청와대 경호실에 소속시켜 대통령 경호원의 임무를 맡긴 것이다. 장사도 본인 또한 '예빈경(禮賓卿)'이라는 관직을 제수받아 조선의 관리로 정착했다. 예빈경이란 외국 사신 접대와 연회, 제향 등을 담당하는 관청인 예빈시(禮賓寺)의 책임자로 종3품 관직이었다. 이는 조선이 초기부터 외국인을 인재로 수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조선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 외국인은 태국인뿐만이 아니다.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위치한 조와국 사신 진언상(陳彦祥)은 조선 조정에 공작과 앵무새를 바치며 국제적인 가교 역할을 했다. 조정은 그에게 종4품의 벼슬을 내려 그의 노력에 화답했다.
그 물결은 태종과 광해군 시절까지 이어진다.
광해군 시절의 기록에 등장하는, 경기와 호남의 해변에 정착해 배를 부리며 살았던 귀화인들의 모습은 조선의 바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거대한 &멜팅 팟(Melting Pot)&이었음을 증명한다.
◆경계 위에서 춤춘 비운의 거인, 동청례
조선이 품은 이방인들의 삶이 늘 장밋빛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삶 속에는 귀화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독과 투쟁, 그리고 시대의 한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성종 시절 무과에 당당히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던 여진족 출신 동청례(童淸禮) 장군의 삶이 그러하다.
그는 연산군 시절 왕실 경호대장에 발탁될 만큼 무용이 출중했고,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의 긴박한 현장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가혹했다. 반정의 공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귀화인이라는 이유로 늘 변방으로 밀려나야 했던& 그는 끝내 신분적 차별의 벽을 넘지 못했다. 쌓인 울분을 토로하던 그는 밀고를 당해 중종 3년, 능지처참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동청례의 죽음은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실력과 충성심보다 출신과 혈통을 앞세워 수많은 인재를 죽여오지는 않았는가. 그의 눈물 섞인 분노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다문화 사회의 그림자와도 닮아 있다.
◆칼을 꺾고 예(禮)를 택하다: 김충선과 장순룡
그러나 비극의 역사 곁에는 찬란한 융합의 역사도 존재한다.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란 속에서 탄생한 김충선(沙也可) 장군의 서사는 한 편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조선 땅을 밟았던 그는 조선의 유교적 예의와 문물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침략의 칼을 꺾고 조선으로 귀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조선에 온 것은 오직 예의의 나라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이었던 일본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조선군에게 조총 제조법과 사격술을 전수하며 국난 극복의 선봉에 섰고, 훗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도 백발의 몸으로 전장을 누볐다. 조선은 그에게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내렸고, 그는 오늘날 우록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조선을 지키는 무관 가문을 형성했으며, 현대사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동량(棟樑)들을 배출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덕수 장씨의 시조 장순룡(張舜龍)이 있다. 위구르계 무슬림이었던 그는 고려 충렬왕의 왕비 제국공주를 수행하여 이 땅에 왔다. 그는 푸른 눈과 높은 코를 가진 이방인이었으나, 고려 여인과 혼인하여 이 땅의 흙이 되기를 자처했다. 고려 국왕으로부터 성씨를 하사받고 장군에 오른 그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성씨 중 상당수가 이방의 피를 수용하며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다.
◆다시, 거대한 바다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이제 &순혈&이라는 좁은 우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가 배척했던 그 &오랑캐&와 &이방인&들이 사실은 우리 왕을 지키던 방패였고, 우리 강토를 지키던 창이었으며, 우리 아이들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와 반대되는 인종은 경멸하고, 외국인의 피가 섞인 다문화인을 이단시하는 사고**는 역사의 진실 앞에 설 자리가 없다. 조선이 비록 폐쇄적이었다고 평가받을지언정, 그 안에서 피어난 수용의 정신은 오늘날의 우리보다 훨씬 더 넓고 깊었을지도 모른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이미 그 자체로 역사의 주인이다. 500년 전 태국에서 온 사신이, 일본에서 온 사무라이가, 위구르에서 온 무사가 그러했듯이, 지금 우리 곁을 살아가는 새로운 이방인들 또한 미래의 우리 조상이 될 이들이다.
지적이고 이성적인 눈으로 역사를 직시하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뜨거운 인류애와 포용의 정신에 가슴을 열자.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서로 다른 빛깔의 강물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조선이라는 바다를 이루어냈다는 그 장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그 바다 위에서 다시 한번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고귀한 선물이며,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진정한 자부심이다.
팬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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