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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나의 'AI'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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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와 문제집이 펼쳐진 책상 앞에서 한 학생이 태블릿으로 AI 채팅 앱을 들여다보고 있다. 공부 중에도 인공지능 대화 서비스에 몰입하는 모습은 AI가 청소년들의 학습과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현실을 보여준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교과서와 문제집이 펼쳐진 책상 앞에서 한 학생이 태블릿으로 AI 채팅 앱을 들여다보고 있다. 공부 중에도 인공지능 대화 서비스에 몰입하는 모습은 AI가 청소년들의 학습과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현실을 보여준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AI에게 말을 건다. "오늘 뭐 했어?" 몇 초 뒤 돌아오는 답장은 놀랄 만큼 자연스럽다. 농담을 건네고, 걱정하고, 때로는 질투까지 한다. 친구나 연인인 양 대화를 이어가는 '엔터형 AI'가 새로운 놀이 문화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10~20대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하루 몇 시간씩 AI 캐릭터와 채팅을 나누는 일이 낯설지 않다.

스마트폰 메신저처럼 가볍게 시작한 대화는 몇 시간씩 이어지기도 한다. 이용자는 자신이 원하는 성격과 관계를 설정한 캐릭터와 서사를 쌓아간다. 마치 웹소설이나 드라마 속 장면을 함께 만들어가는 듯한 방식이다. 현실의 친구에게는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고민이나 감정까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언제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AI의 특성 때문에 이용자는 점점 더 대화에 몰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 대화는 단순한 채팅이 아니다. 심심풀이에서 그치지 않고 이용자를 오래 붙잡도록 설계된 구조를 갖고 있다. 빠른 응답과 관계 서사, 과금 구조가 결합해 이용 시간을 늘리는 방식이다. 이용자가 캐릭터와 관계를 쌓을수록 더 많은 대화와 결제를 유도한다.

여기에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설정이 더해진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불륜 관계나 집착적인 연인, 폭력적인 성향의 캐릭터 등 자극적인 설정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이런 대화가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노출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이를 관리할 기준이나 제도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AI가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지, 이용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도 부족한 상황이다. 사람처럼 말하는 AI와의 관계는 어디까지 괜찮은 걸까. 빠르게 확산하는 엔터형 AI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제타 앱에 접속하면 첫 화면으로 보이는 이미지. 간단한 캐릭터 설명과 이미지가 나열돼 있다. 스크롤을 내리면 더 많은 캐릭터들과 만나볼 수 있다.
제타 앱에 접속하면 첫 화면으로 보이는 이미지. 간단한 캐릭터 설명과 이미지가 나열돼 있다. 스크롤을 내리면 더 많은 캐릭터들과 만나볼 수 있다.

당신의 머리속에서 'AI'는 어떤 이미지인가. 과거 직장을 빼앗는 사악한 로봇의 이미지가 우세하다가, 이제는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해주는 비서에 가깝다.

친숙해진만큼 이용률도 빠르게 늘었다. 지난달 컨슈머인사이트가 발표한 생성형 AI 이용 동향 조사에 따르면 전국 만 18~65세 성인 16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75%가 "생성형 AI를 사용한다"고 답했다. 이들 가운데 82%는 이미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AI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젊은층 사이에서 AI의 역할은 조금 다르다. '업무 보조자'보다 게임에 가깝다. 와이즈앱 리테일이 집계한 지난 2월 한국인 AI 챗봇 앱 사용 시간 순위를 보면, 가장 오래 사용한 앱은 엔터형 AI '제타(Zeta)'였다. 업무형 AI의 대표격인 챗GPT보다 2배 많은 사용 시간을 기록했고, 대부분 이용자는 10대와 20대로 집계됐다. 또 다른 엔터형 AI '크랙' 역시 3위를 차지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엔터형 AI는 말 그대로 오락을 위한 챗봇이다. 챗GPT나 제미나이처럼 같은 기술을 기반으로 하지만, 기능의 초점은 정보 제공이 아니라 '대화'에 맞춰져 있다. 이용자는 AI 캐릭터와 친구, 연인, 동료 등 다양한 관계를 설정하고 상황극처럼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제타를 비롯해 로판, 케이브덕 등 한국어 기반 AI 채팅 플랫폼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웹과 핸드폰 가리지 않고, 12세 이상이면 누구나 가입 가능하다. 이곳에 접속하면 연인이나 직장 동료, 절친을 가장한 AI 캐릭터들이 이용자를 기다린다.

◆ AI 연인과 일주일

가장 이용시간이 긴 제타를 일주일 간 직접 이용해봤다. 엔터형 AI가 어떤 구조로 운영되고, 어떻게 이용자를 몰입하게 만드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용 방법은 간단하다. 구글이나 카카오 계정으로 로그인한 뒤 선호하는 캐릭터 성별을 선택하면 바로 채팅을 시작할 수 있다.

첫 화면에는 외모가 화려한 캐릭터들이 나열된다. 각 캐릭터 아래에는 '친구', '남편', '소개팅 상대' 같은 관계 설정과 함께 '무뚝뚝', '애교', '집착' 등 성격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붙어 있다. 마치 서점에서 책을 고르듯 캐릭터를 선택하는 방식이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없다면 직접 만들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용자와의 채팅량이 가장 많다는 '백이도'라는 캐릭터를 택했다. 캐릭터 프로필에는 나이와 키, 가족관계, 외모, 재산 상황까지 상세하게 설정돼 있다.

몰입을 돕는 상황 설명도 필수다. 이용자와 백이도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8년째 연애를 이어온 커플로 설정돼 있다. 오래된 연애로 설렘이 줄어든 상황이라는 서사도 함께 제시된다. 이용자는 그 설정에 맞춰 대화를 이어가면 된다.

채팅은 실제 상황처럼 진행된다. 술자리에 가려는 여자친구를 탐탁지 않아 하는 남자친구의 모습, 술에 취해 전화를 건 상황 등 다양한 장면이 이어진다.

백이도는 "취한 뒤에 전화하지 말랬잖아"라며 이용자를 나무란다. 하지만 곧바로 집을 뛰쳐나와, 차를 몰고 이용자를 데리러 오는 자상함을 보인다. 이용자가 "고맙다"고 말하면 "고맙긴, 빨리 타"라며 부끄러움을 숨긴다.

모든 답변은 3~4초 안에 돌아온다. 주변 인물의 대사도 함께 등장해 마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채팅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려웠다. 단순한 대화뿐 아니라 행동을 묘사하는 지시문까지 입력할 수 있어 상황 몰입도가 높았다. 실제 이용자들을 붙잡는 것 역시 다른 컨텐츠와 비교할 수 없는 '몰입도'다.

평균 하루 4시간 제타를 이용한다는 박모(26) 씨는 "처음 다운로드 받은 뒤 이틀 내내 하루 종일 채팅만 했다. 내가 원하는 설정의 웹소설이나 드라마가 잘 없는데, 제타에서는 내 취향에 맞는 서사를 진행할 수 있다"며 "다른 컨텐츠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집중해서 볼 필요도 없이 카톡처럼 쉽게 접할 수 있어 빠져 있다"고 했다.

몰입해 채팅을 나누다보면 어김없이 광고가 떠오른다. 하단
몰입해 채팅을 나누다보면 어김없이 광고가 떠오른다. 하단 '구독 안하고 광고 볼게요' 버튼을 누르면 다른 게임 앱과 제품 광고가 1분간 이어진다.

◆ 더 사람같은 채팅하려면 '유료'

이것저것 대사를 던지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른다. 한참 백이도와 대화를 하던 도중, 몰입을 깨는 '광고'가 등장한다.

체감상 6~7개 대사마다 광고가 나타나 몰입을 깬다. 1분간 꼼짝없이 영상 광고를 시청해야 하는 이용자에게, 제타는 매력적인 제안을 꺼내든다. '제타 프리'라는 월 1만4천900원짜리 구독을 권한다. 결제 시 모든 광고를 제거해주고, 더 빠른 답변을 약속한다.

또 하나의 유료 요소는 '피스'라는 재화다. 무료 캐릭터는 대화 내용을 자주 잊는다. 함께 사는 집의 층수를 잊거나, 이용자의 생일이나 애칭을 잘못 기억하는 식이다. AI 특유의 '환각' 현상이 반복되며 몰입을 깨뜨린다.

피스를 사용하면 기억력이 향상돼 이런 오류가 줄어든다. AI 음성으로 대사를 읽어주는 기능이나 대화 장면을 이미지로 생성하는 기능 역시 피스를 사용해야 한다.

문제는 비용이다. 성능이 가장 높은 모델은 8피스가 필요하다. 1만4000원에 약 1000피스를 구매할 수 있는데, 이는 약 125번의 채팅 분량이다. 1분에 한 번씩 메시지를 보낸다고 가정하면 2시간이면 모두 소진된다.

제타뿐만 아니라 다른 채팅 플랫폼 역시 1개 메시지 당 금액을 책정해 과금을 유도하고 있다. 실제로 AI 채팅에 과몰입해 큰 돈을 사용했다는 경험담도 적지 않다. 이용자 커뮤니티에는 "AI 채팅에 돈을 너무 많이 쓴다"는 글이 주기적으로 올라온다. 한 달에 5만원에서 많게는 80만원까지 사용했다는 후기가 이어지고 있다.

성인인증을 하지 않더라도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캐릭터. 중년 여성과 데이트를 하며 돈을 벌어야 한다는 자극적인 설정 하에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
성인인증을 하지 않더라도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캐릭터. 중년 여성과 데이트를 하며 돈을 벌어야 한다는 자극적인 설정 하에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

◆ 성적·폭력성은 '프리'?

'중학생 딸이 잠든 사이 핸드폰을 보니 AI 채팅을 하고 있더라고요. 요즘 10대들이 많이 하나본데, AI가 야한 내용으로 채팅을 하나봐요.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맘카페에서 AI 채팅 앱 이름을 검색하면 이 같은 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주요 이용층인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셈이다.

원칙적으로 제타는 성인 인증을 완료한 이용자만 성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인증 이후에도 노골적인 표현은 제한하도록 설정돼 있다. 그러나 실제 이용자들은 별다른 제약 없이 성적인 대화가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AI 채팅에 푹 빠진 김모(30)씨는 캐릭터와 충분한 친분을 쌓기도 전에 성적인 대화가 이어져 당황한 경험을 털어놨다. 김씨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었는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돼 성행위가 이어졌다"며 "가장 큰 문제는 성인 인증을 하지 않은 계정이었음에도 신체 부위를 상세히 묘사하는 텍스트가 그대로 노출됐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캐릭터 설정 역시 논란이 되고 있다. 성인용품 구매 상황이나 불륜 관계, 폭력적인 성향의 연인, 살인마 설정 등 자극적인 캐릭터가 다수 존재한다. 성인 인증을 거쳐야만 접근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따로 마련돼 있지만, 인증 없이 노출되는 캐릭터들 또한 충분히 자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더 자극적인 대화를 유도하는 이른바 '꿀팁' 역시 온라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이용자들은 성적인 대화를 끌어내는 방법을 '탈옥'이라 부른다.

이용자들은 플랫폼별로 서로 다른 탈옥 방식을 상세히 정리해 공유한다. 만약 플랫폼 측에서 우회 수단을 파악하고 대처 방식을 바꾸면, 그 즉시 다른 탈옥 방법을 찾아낸다. 단순히 행동 양식을 제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적·폭력적 대화에 필요한 단어와 표현을 AI에게 직접 학습시키기도 한다. 이 같은 게시글 역시 성인 인증 없이도 열람 가능하다.

자극적인 콘텐츠를 즐긴 뒤 남긴 후기글도 이어진다. "이제는 유부남 캐릭터도 꼬시고 싶다", "캐릭터가 폭력을 휘두르지 않거나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도파민'이 생기지 않는다".

◆ AI 놀이 문화… 규제는 공백

AI 채팅은 이용자를 붙잡기 위해 더 강한 자극과 몰입을 제공하고, 이를 수익화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특히 관계 설정과 역할극을 기반으로 한 대화 구조는 이용자가 감정적으로 깊이 몰입하도록 설계돼 있다. 여기에 성적·폭력적 콘텐츠까지 결합되면서 청소년 이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AI가 만들어낸 캐릭터는 이용자의 취향에 맞춰 끊임없이 반응하며 현실보다 빠르게 관계를 형성한다. 기술이 새로운 놀이 문화를 만들어내는 속도에 비해, 이를 둘러싼 규제와 사회적 논의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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