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이하 삼전닉스)가 호남 지역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추진한다고 소식이 알려지면서 국내 가동중인 원전의 절반이 있는 경북에서는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과 산업 정책이 서로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동안 수도권에만 집중되던 첨단 반도체 생태계를 남부권으로 확장해 국토 균형 발전을 이루겠다는 신호탄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이번 호남에 대규모 투자가 동해안을 중심으로 원자력 발전소와 소형모듈원전(SMR)을 건설해 국가 전력 공급망의 중심축으로 삼겠다는 정부의 핵심 에너지 정책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북 전력생산량 전국 1위
경북은 전력생산량 전국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 에너지안보의 중심지다.
한국전력통계에 따르면 2025년 기준 경북의 전력생산량은 10만7천143GWh(원전 96,277, 신재생 7,571, 기타 3,295)로, 전국 전력 생산량의 18%를 차지하는 등 전국 최대 생산지다. 전력자립률도 경북은 228%로 전국 1위를 차지하는 등 국가 경제성장 및 탄소규제 대응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경북 동해안은 대한민국 최대 원자력발전 밀집지역이다. 국내 가동중인 원전 26기 중 13기(한울·신한울 8기,월성·신월성 5기)가 경북에 위치해 있다. 경북의 원전에서 전국의 원자력 발전량(18만4천693GWh)의 52.1%인 9만6천277GWh를 생산하고 있다.
여기에 울진의 신한울원전 3·4호기가 건설중이고, 최근 영덕에 2기의 원전을 유치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에너지 수도라고 할 수 있다.
경북지역내 전력 생산량의 56% 이상(6만4천586MWh)을 수도권 등 타지역으로 송전하고 있다. 송전 선로 건설에 따른 수많은 갈등과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등 국가적인 비효율을 초래하고 있다.
또 경주시 문무대왕면에는 2015년부터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방폐장)이 운영중이다. 원전에서 전기를 생산해 절반 이상을 수도권 등지로 보내는 초고압 송전선로와 변전시설,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처분하는방폐장까지 경북에 집중돼 있다.
◆"위험은 동해안, 혜택은 다른지역"
경북 동해안에는 국가 에너지 안보를 위한 원전과 방폐장, 대규모 송전망 등 국가 에너지 기반시설이 집중돼 있지만 이번에 '삼전닉스'가 호남권에 대규모 투자가 알려지자 지역주민들은 매우 허탈감에 빠져 있다.
지역 주민들은 "원전과 방폐장으로 수십 년간 안전에 대한 위험 부담과 개발 제한 등을 감수해 왔는데, 정작 미래 먹거리인 첨단산업은 다른 지역으로 간다는 것은 '전력 생산지 역차별'이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경북도와 지역민들은 원전과 가까운 곳에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후공정 등 첨단 제조업 등을 우선 배치하는 정책 도입과 원전 주변에 입주하는 기업에 대한 산업용 전기요금 할인과 송전망 이용료 감면 등 인센티브 제공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경북도가 구상 중인 울진의 원전과 수소, 영덕의 신규 원전 및 에너지 산업, 포항의 철강·이차전지·수소환원제철, 경주의 SMR·원자력 클러스터를 연결하는 동해안 산업벨트 조성에 대한 정부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다
이는 지역 이기주의가 아니라 에너지 정의와 국가균형발전, 전력 생산지 보상 문제와 부합된다는 것이다.
◆공장 입지와 국가 전력 공급망 정책이 따로 노는 엇박자
삼전닉스 호남 투자설 뒤에는 국가 산업 생태계의 명운을 가를 암초가 숨어 있다. 바로 전력 문제다. 반도체 공장은 단 1초의 미세한 전압 강하로도 수천억 원의 손실을 입기에 24시간 안정적인 양질의 전기가 공급되어야 하는 기저부하 산업이다.
문제는 이번 대규모 투자가 동해안을 중심으로 기존의 원자력 발전소외에 신규 원전과 소형모듈원전(SMR)을 건설해 국가 전력 공급망의 중심축으로 삼겠다는 정부의 핵심 에너지 정책 기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영덕에 신규 대형 원전을, 부산 기장에 SMR을 건설 후보지로 선정한 것이 그 예다.
산업계와 에너지 전문가들 사이에서 "공장 입지와 전력 공급망 정책이 따로 노는 엇박자"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호남이 국내에서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가장 높은 지역이기 때문에 전력 수급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호남의 전력 자립도는 200%를 웃돈다. 글로벌 기업들이 요구하는 'RE100(재생에너지 100%)' 기준을 맞추기에 호남은 최적의 입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재생에너지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인 '간헐성'을 간과했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전공정 라인에는 기가와트급 전력이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하기 때문이다.결국 호남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기저 전력이 필수적인데, 영광의 한빛원전의 수명 연장이나 대규모 LNG 복합발전소를 추가 건설, 대규모 에너지 저장장치(ESS)를 구축해야 한다. 또다른 환경적 사회적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해외는 '전력 생산지=첨단산업' 전략
최근 세계 AI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전력이 있는 곳에 산업이 간다'는 공식이 현실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항만·공항·인력이 산업 입지를 결정했다면, 최근에는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 확보 여부가 첨단산업 입지의 가장 중요한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용수와 부지·전문인력 확보, 인프라 등 여러 요인들도 산업입지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특히 반도체 공장이나 AI 데이터센터 등은 막대한 전기를 24시간 365일 안정적 공급이 입지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떠오르면서 발전소 인근 입지를 적극 검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웹서비스(AWS), 구글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최근 신규 데이터센터의 전력 공급원으로 원자력 발전과 소형모듈원전(SMR)을 적극적으로 채택하며 밸류체인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MS가 가동이 중단됐던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의 재가동을 위해 20년 장기 전력구매계약을 체결했고, 아마존AWS도 원전과 직결된 데이터센터 부지를 매입하는 등 빅테크의 원전 선회 흐름이 뚜렷하다. 이들은 또 초기 건설 비용이 적고 안전성이 우수한 SMR을 데이터센터 전용 전력원으로 독립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결국 세계 빅테크기업들은 24시간 365일 수백MW~GW급 대규모 전력의 안정적인 확보가 가능하고 낮은 전력단가, 탄소배출 감소 등의 이유로 원전과 SMR을 전력원으로 활용하고, 이들 시설이 있는 인근에 공장을 입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반도체 클러스터, 산업정책과 에너지 정책의 시험대…집중과 선택 필요
삼전닉스의 호남에 대규모 반도체 투자설이 나오면서 김장호 구미시장은 지난 25일 기자회견을 통해 반도체 팹 유치를 위해 구미국가산단 2단계 부지를 평당 1천원에 분양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이는 당초 예상분양가인 평당 148만원에서 사실상 공짜로 제공하겠다는 뜻이다. 반도체 팹 유치는 단순한 공장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기업들이 집적된 산업생태계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와 구미의 미래가 달렸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지역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은 동의학고 환영하지만 관련 산업의 입지는 집중과 선택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경북연구원 나중규 연구본부 본부장은 " 반도체와 AI 데이터 센터 등은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가 전력이다. 이 때문에 글로벌 빅 테크기업들도 전력원 바로 인근에 관련 공장을 건설하려고 한다"면서 "경북도는 현재 13기의 원전 가동중이고, 영덕에도 원전을 추가 건설할 예정인 만큼 전력기반을 갖춘 대구 경북에 반도체와 AI 데이터 센터 등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산업을 육성하는 중앙정부의 정책적 배려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 본부장은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산업의 분산 배치는 필요하지만 데어터센터와 반도체 분야에는 이미 장기간의 투자를 해 특화되거나 밸류체인을 갖춘 대구와 구미 등에는 관련 산업을 더욱 집중 육성이 필요하다"면서 "한 산업이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10~20년 이상 걸린다. 호남 등 신규로 대규모 투자를 할 곳에는 그 지역에 특화된 산업을 골라 집중 육성하는 것이 산업적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고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만큼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둘러싼 이번 논란은 특정 지역의 이해 관계를 넘어 대한민국의 산업정책과 에너지 정책이 얼마나 긴밀하게 맞물려 가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다. AI 시대에 국가경쟁력은 전력을 어디에서 생산해 어떤 산업과 연결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느냐에 미래가 좌우되는 만큼 이번 기회에 에너지산업과 첨단산업이 함께 성장하는 국가전략이 마련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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